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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방 2/마가복음

깨뜨리는 사랑

by ongdalsem 2020. 10. 20.

마가복음 143-9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이 살고 있다. 살아가는 방법도 가지가지이고 하는 일들도 매우 다양하다.

매사에 부지런하고 성실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매우 게으르고 불성실한 사람도 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여러 사람으로부터 손가락질을 받고 사는 사람도 있다.

어떻게 무엇을 하고 사느냐에 따라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기도 하고, 비난을 받기도 한다.

 

어떤 사람을 보고는 좋은 사람이라고 하고, 다른 어떤 사람을 보고는 나쁜 사람이라고 한다.

어떤 사람이기를 원하는가? 어떤 사람으로 인정받기를 원하는가? 어떤 일을 하고 살기를 원하는가?

좋은 사람으로 인정받고 좋은 일을 하며 사는 것이 누구나 원하는 삶일 것이다.

좋은 사람이 되려면 좋은 일을 해야 한다. 좋은 일을 하면 좋은 사람으로 인정을 받게 되는 것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5:21-22)

그러면 좋은 일은 어떤 것인가?

 

어느 날 

예수께서 베다니에 있는 문둥이 시몬의 집에 방문하셔서 식사를 하고 계셨다.

그 때에 이웃에 살고 있는 한 여인이,

아주 값이 비싼 순전한 나드 향유가 가득 들어있는 옥합을 가지고 달려와서

가지고 온 옥합을 깨뜨리고 그 안에 있던 값비싼 향유를 모두 예수의 머리에 부어버렸다.

 

방안에 있던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누가 말릴 틈도 주지 않았다.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 일어난 것이다.

순전한 나드 향유 한 옥합은 엄청나게 비싼 것이었다.

모든 향료가 다 귀한 것이지만 특별히 나드 향유는 더 귀한 것이었다.

그것은 히말라야 산맥과 인도의 고산지대에서만 생산되는 아주 귀하고 값비싼 화장품이었다.

 

그 값은 자그만치 300데나리온이나 되는 것이었다.

당시 농부들의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이었던 시절이었으니,

그것은 농부들의 일년 품삯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한 가족이 일년을 먹고 살만한 재산이었다.

그런데 그 값비싼 향유를 순식간에 예수님의 머리에 들어붓고 말았으니

사람들이 놀라 자빠질 수밖에 없었다.

 

어떤 사람은 화를 내면서 이 여인을 향해서 큰 소리로 말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요? 이럴려고 그 비싼 향유를 지금까지 보관해 두었단 말이요?

이럴 바에는 차라리 진작 가난한 사람들에게나 나누어 줄 일이지 이게 뭐하는 짓이요?”

사실 그것은 그랬다. 그 사람 말이 백번 옳았다. 정말 그것은 엄청난 낭비였다.

 

아무튼 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을 두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왜 그 비싼 것을 쓸데없이 허비하느냐고 그 여인을 책망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전혀 뜻밖의 말씀을 하셨다.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그리고 또 말씀하셨다.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9절)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이 여인에게는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아무것도 아까운 것이 없었다.

분명한 것은 이 여인이 자기 생명이라도 드릴 수 있을 만큼 예수께로부터 큰 은혜를 입었다는 것이다.

사실 그 시골 베다니 마을에서 가난하게 살고있는 여인에게 이만한 재산은 생명 같은 것이었다.

그러니 그가 나드 향유 한 옥합을 모두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것은 생명을 드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왜 예수께서 이 여인이 좋은 일을 했다고 하셨을까?

첫째, 사랑으로 했기 때문이다. 사랑에는 계산을 초월하는 낭비가 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아까운 것이 없는 것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계산하지 않는다.

이것, 저것 재는 것은 아직 사랑에 빠지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시간을 내는 것이 아까운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돈을 쓰는 것이 아까운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일을 하는 것이 괴로운가?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를 위해 쓰는 시간을 낭비로 여기지 않는다.

이 여인을 꾸짖던 사람들은 사랑보다 계산이 앞서 있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해 쓰는 시간을 낭비로 여기지 않는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해 쓰는 물질을 아깝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사랑이 식고 계산이 앞서면 내 시간이 아깝고, 내 물질이 아깝게 여겨진다.

그래서 나는 하기 싫고, 나는 드리기 싫어진다. 그리고는 다른 사람이 그렇게 하기를 바란다.

뿐만 아니라 아낌없이 헌신하는 사람들을 정신 나간 사람쯤으로 여긴다.

 

두 번째로, 이 여인은 기회를 잘 포착했다. 기회는 여러 번 오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좋은 일을 하려 해도 기회를 놓치면 헛일이다.

성경이 말씀한다.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느니라“.(전 3:1-6)

 

부모에게 효도하는 일도 그렇다. 기회가 있을 때에 해야 한다. 세월은 사람을 위해서 기다려 주지 않는다.

성경 전도서에 보면 범사에 때가 있다고 했다.(전3:1) 때를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사랑할 수 있을 때에 사랑할 것이고, 섬길 수 있을 때에 섬길 것이다.

공부해야 할 때 공부하고 놀 때 놀아야 한다.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그때가 분명히 우리 앞에 오고 있다.

 

어떤 사람이 반신불수가 되어 병원에 누워 있다가 문병을 간 목사에게 말했다.

“한번만 더 교회에 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성도님들을 위해 봉사하다가 죽었으면 좋겠습니다“.

평소에는 그렇게도 잘 빠지고, 봉사하고 섬기기를 싫어하다가,

기회를 놓치고 나서 후회해 봐야 모두 쓸데없는 일이다.

 

세 번째로, 이 여인은 자기의 최선을 다했다. 기왕에 할 바에야 성심 성의껏 하는 것이 귀한 것이다.

옛말에 ‘처삼촌 묘 벌초하듯 한다’ 는 말이 있다.

무엇이나 대충 대충 건성으로 한다는 말이다. 진심이 담겨있지 않은 모습을 말하는 것이다.

그럴 듯하게 모양만 갖추는 것은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어느 날 제자들과 함께 성전에 가셨다. 여러 부자들이 성전에 들어가면서 많은 돈을 넣었다.

그 뒤를 따르던 한 가난한 과부는 엽전 두 ‘렙돈’을 넣고 성전으로 들어갔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쓰는 돈으로 한 페니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이것을 보시고 예수께서는 가난한 과부가 여러 부자들보다 더 많이 넣었다고 하셨다.

그 이유는 부자는 많은 것 중에서 일부를 넣었지만,

그 과부는 자기의 모든 것을 넣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

 

나드 향유 한 옥합을 가져와서 옥합을 깨뜨리고 모두 예수님을 위해 부어버린 이 여인은,

그가 가지고 있는 최상의 것을 드렸다. 자기의 있는 힘을 다해서 헌신했다.

옥합은 아무나 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은혜 받은 자가 깨뜨릴 수 있는 것이다.

 

이 여인은 자기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귀한 옥합을 깨뜨렸지만,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자기 몸을 깨뜨리셨다. 그 피로 우리의 죄를 씻어 주셨다.

우리에게는 여러 가지의 옥합이 있다. 재능이 있다. 건강이 있다. 시간이 있다. 물질이 있다.

이 모두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가 아닌가? 

그 은혜를 기억하며 최상의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드림으로,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도다!’ 하고 인정받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옹달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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