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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방 2/마가복음

하나님, 나, 그리고 예수님

by ongdalsem 2020. 9. 14.

마가복음 12장 1-12절

 

성경 안에 무엇이 있는가?

어떤 주일학교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물었다.

“어린이 여러분! 성경에는 뭐가 들어있을까요?”

그 떄 한 꼬마가 손을 번쩍 들더니,

“선생님. 우리 형 성경 안에는 우리 형 애인 사진이 들어 있어요” 하고 대답했다.

 

성경은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다루고 있는 책이다.

성경을 볼 때,

첫째, 이 본문이 하나님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고 있느냐 하는 것과,

둘째, 이 본문이 사람에 대해서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셋째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벌어진 틈을 없애기 위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아야 한다.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문제가 생긴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자기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시고 하나님과 함께 행복하게 살게 하셨다.

그런데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으므로 그 행복을 잃었다.

그것이 바로 죄다. 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말았다.

그런데, 바로 이 죄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과 인간을 화목하게 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다.

 

본문을 흔히 포도원과 악한 농부의 비유라고 말한다.

본문에 어떤 한 사람이 등장한다.

그가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즙 짜는 구유 자리를 파고 망대를 짓고,

그리고 농부들에게 이 아름다운 포도원을 세로 주고 먼 타국으로 떠났다.

 

이 한 사람은 하나님을 비유한 것이다.

이 한 사람의 역할과 행동 속에서 하나님은 어떠한 일을 하시는 분인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는, 소위 하나님의 속성을 발견할 수가 있다.

 

이 비유 속에 나타나신 하나님, 그 분은 아주 좋으신 하나님이시다!

포도원을 만들기 위해서 이 주인은 여러 가지로 애를 썼을 것이다.

정성을 다해서 포도원을 아름답게 만든 후에 그것을 거의 선물로 주었다.

그리고 때가 이르매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냈다.

 

여기서 ‘얼마’라는 단어는 본래 희랍어 단어에서 소량 즉, 지극히 적은 것이라는 말이다.

주인이 얼마를 요구한 것은 돈이 필요해서 받은 것이라기보다는 소유주의 확인이 목적이었다.

이 포도원은 우리의 삶의 마당, 삶의 조건을 대표하는 상징이다.

하나님은 온갖 아름다운 삶의 조건을 우리에게 주셨다.

야고보서 1장 17절에, 각양 좋은 은사와 그리고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우리에게 내려왔다 고 말씀하고 있다.

 

우리가 누리는 온갖 좋은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 주어진 것이다.

우리의 생명, 또 아름다운 공기, 하늘, 우리가 숨쉴 수 있는 것, 사랑하는 사람들,

모두 다 선물로 주신 것이고, 이것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하나님이 모든 다른 만물들을 지어 놓으시고 마지막에 인간을 지으셨다.

아담과 하와의 눈앞에는 모든 것이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포도원을 만들고 그것을 농부에게 맡긴 주인처럼,

하나님은 우리 삶의 마당을 준비하시고 그것을 선물로 우리에게 주셨다.

그리고는 “잘 다스리라”고 하셨다.

믿지 못할 사람에게는 다스리라고 맡길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믿지 않는 대상에게 무엇을 어떻게 맡길 수가 있겠는가?

하나님은 사람을 믿으셨다. 그런데 사람은 하나님을 잘 믿지 못한다.

 

본문의 비유 속에 나타나신 하나님은 또한 인내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타국으로 떠난 이 주인은 때가 이르렀을 때, 농부들에게 소출 얼마를 원하며 종을 보냈다.

그랬더니 저희가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빈손으로 내어보냈다.

이럴 수가 있는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그 다음 절에 보면, 이 주인은 다시 다른 종을 보낸다.

이번에는 그 종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모욕을 주어서 돌려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은 또 어떻게 했는가? 또 다른 종을 보냈다,

이 주인의 엄청나게 오래 참을 수 있는 인내심에서 우리는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본다.

 

하나님은 너무나 아름다운 것들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다.

이 선물들을 사용해서 주의 뜻을 이뤄가며 살도록 하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하나님을 무시하고 혹은 하나님을 불신하고 또 하나님을 불순종하고

또 하나님이 하나님의 뜻을 촉구하기 위해서 보내신 종들의 메시지 앞에 귀를 막고,

때로는 그 종들을 핍박했고, 또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지만 그렇다고 그 인내가 영원히 계속되는 것은 아니다.

어느 날 그의 인내가 그치는 순간이 다가올 것이다.

9절에,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뇨,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했다.

 

마지막에는 자기의 아들마저 보내었지만 그 아들까지 죽여 버린 이 사람들에게,

예수께서는 이렇게 묻고 있다.

“너희들이 포도원 주인이라면 이럴 땐 어떻게 하겠느냐?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지 않겠느냐?”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선물을 주시고,

그리고 이 선물을 통해서 복된 삶을 누리기를 기대하신다.

그러나 창조주의 기대를 저버리고,

우리의 역할, 우리의 반응, 우리의 응답이,

하나님을 향한 불순종이고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반역일 때,

우리는 마침내 엄정한 그의 심판 앞에 직면할 각오를 해야 한다.

 

본문의 비유 속에서 포도원 맡은 농부는 죄성을 가진 사람을 비유한 것이다.

인간은 이기적인, 너무나 이기적인 존재로 나타나고 있다.

하나님은 이 포도원을 포함해서 이 모든 것을 선물로 맡겨 주셨다.

우리들은 맡은 자에 불과하다. 주인의 것을 맡아 관리하는 청지기일 뿐이라는 말이다.

주인은 따로 있다.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맡은 자일 뿐이다.

 

그 분이 나에게 생명도 맡겨 주셨고, 남편도 아내도 자식도 맡겨 주시고,

내 재능도 맡겨 주시고, 돈도 맡겨 주시고  시간도 맡겨 주셨다.

우리는 내게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당연한 진리를 알면서도,

그것을 내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하나님의 것을 내 것으로 만들려 하고 있다.

 

본문에 그런 사실이 아주 극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업이 우리 것이 되리라'.

하나님의 것을 끊임없이 내 것으로 여기고 싶어하는 마음,

아닌 줄 알면서도 그것을 우리의 것으로 선포하고 싶어하는 마음,

그것이 이기적인 인간의 모습이다.

 

어떤 농부가 봄에 씨를 뿌렸다. 그리고 땀을 흘려서 열심히 일했다.

가을이 가까워온 다. 보기 드문 풍년이 들것 같다.

그래서 이 농부는 곡간을 넓히는 창고 개조작업을 착수했다.

그의 예상은 적중했고, 드디어 그는 넓혀놓은 곡간마다 곡식을 가득가득 채울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는 영혼을 향해서 이런 독백을 시작했다.

“내 영혼아 이제 여러 해 쓸 물건을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먹고 마시고 즐기자“.

 

그렇게 상념에 잡혀 있을 때,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는가?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내가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그렇게 쌓아둔 네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눅 12:16-20) 하셨다.

 

우리의 목숨이 누구의 것인가?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남편, 아내, 누구의 소유인가? 자녀는? 재산은?

모두가 내것이라고 생각하는가? 한 순간에 날아가 버리는 수가 있다.

하나님이 이제 손놓고 오라 하시면 빈 손들고 가야 한다. 거절할 수 있는 자가 누구인가?

하나도 내 것이 없다. 내 것이라고 착각하고 사는 것뿐이다.

 

하나님의 것임에 분명하고도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숨어있는

이기심의 정체를 확인해 보아야 한다. 

적은 분량의 세를 받기 위해서 보내어진 이 종들을 어떻게 대접했는가?

때리고, 상처를 내고 능욕하고 죽였다.(3-5절)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애쓰는 선교사들이 순교를 당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옛적에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서 여러 모양으로 우리에게 권고하셨다.(히1:1)

수많은 종들을 보내서 우리에게 회개하고 돌아올 것을 촉구하셨다.

아들까지 보내셔서 우리로 하여금 주인 되신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요구하셨다.

 

그러나 여전히 사람들은 그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이 반역적인 존재, 이것이 죄를 범한 우리 안에 숨어있는 죄의 정체다.

하나님을 향해서 반역적인 존재의 모습. 이것이 나의 모습이다.

그래서 이 죄 때문에 하나님과 나 사이가 벌어지고 만 것이다.

 

그러면 소망이 없는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참 소망이 있다.

본문의 비유 속에서 예수님은 어떤 분으로 나타나고 있을까?

'오히려 한 사람이 있으니 곧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가로되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더니'(6절).

 

포도원 주인은 최후로 아들을 보냈다. 이 아들은 예수님을 비유하는 것이다.

이 비유 속에서 예수님은 다른 종들과 구별되고 있다.

그것은 그냥 하나의 종이 아니라 그 분은 아들이시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종의 모습으로 오셨다. 그리고 종의 역할을 감당하신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본질은 종하고는 구별된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하나님이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마 3:17)

 

본문의 비유 속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 예수 그리스도는,

고난을 받으시고 죽임을 당할 것이 예언되어 있다.

만 백성을 위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실 일을 눈 앞에 두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저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자.

그러면 그 유업이 우리 것이 되리라 하고, 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어 던졌느니라”.(7-8절)

이 비유를 말하면서 예수님은 무엇을 생각하고 계셨을까?

 

이 말씀을 하시면서 예수께서는, 

며칠 후에 자기 자신이 성문 밖 골고다 언덕에서 죽임을 당하고,

무덤에 던져질 그 광경을 보시고 있었을 것이다.

사람이 고난을 모르고 당할 때는 그냥 모르고 어느 정도 쉽게 넘어갈 수가 있다.

정말 고통스러운 것은 내가 당할 그 고통을 알고 당할 때다.

그는 닥쳐올 고난을 아셨다. 고난의 무게를 알았고 고난의 깊이를 알았고,

그 상처의 아픔을 알고 계셨다.

고난 받으시고 죽음을 당하실 분. 이것이 비유 속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이다.

 

마치 건축자들의 버린 돌처럼 버림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에 버림을 당하신 그 예수님이 당하신 그 고난과 희생을 통해서

나의 죄를 도말하시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셨다.

 

좋으신 하나님이 죄에 빠진 나를 위해 십자가의 희생 제물이 되시고,

그 십자가의 공로로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시며,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셨다.

 

(옹달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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