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골방 2/마가복음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

by ongdalsem 2020. 9. 11.

마가복음 11:20-25

 

예수께서 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시다가 배가 고프셨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무화과나무 한 그루가 있는 것을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화과 열매가 있을까하여 가셨다.
제자들도 시장했을 것이다. 그래서 나무를 향해서 가까이 가 보았더니 열매가 없었다. 

예수께서 나무를 향하여 말씀하셨다.
“이제부터는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14절)

 

그런데 13절 마지막 부분에 보면 무화과 때가  아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금은 이해하기가 어려운 이야기다.
무화과나무 때도 아닌데 가서 열매를 기대했다가 열매가 없다고,
그 나무더러 다시는 열매를 따먹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저주하셨다니,  말이 되는가?

이스라엘에서 본격적인 무화과나무의 추수기는 6월이나 7월경이다.  
그 때까지 본격적으로  무화과나무가 많은 열매를 낸다. 
그러나 때로는 좀 더 일찍이, 이른 봄철에 열매를 맺기도 하고 
좀 늦은 가을까지 열매를 맺기도 한다.

무화과나무는 먼저 잎사귀를 낸다. 그런데 잎사귀가 나면 열매가 함께 나온다.
다른 나무와 달리 잎사귀가 있으면 무화과나무는 이미 열매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잎사귀가 있으면 열매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잎사귀가 있으니까, 열매가 있을 것을 기대한 것은 상식적인 일이었다.

 

그런데 가서 보니까 열매가 없었다. 이건 정상이  아니다. 
무화과나무의 잎이 무성하면 열매가 있는 법인데 열매가 없었다. 
그래서 이  나무를 저주하신 것이다. 
무화과나무는 열매가 있어야 가치가 있는 것인데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무엇에 쓸 것인가?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의 의미를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다.
예수께서 이 나무를 도대체 왜 저주를 하셨을까?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하셨는가? 
성경에 나타난 많은 기적들을 기적 자체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기적을 통해서 전달하려고 하는 메시지가 있다. 
그래서 그러한 기적을 가리켜서 복음서는 아주 독특한 표현을 쓰는데 ‘표적’이라고 말한다.
표적은 사건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건을 통해서 전달하려고 하시는 어떤 메시지가 있는 것이다. 

열왕기상 11장 29절에 보면 아히야라는 선지자가 나타난다. 
이 선지자가 어느 날 여로보암이라는 왕 앞에  나타나서,

새 옷 새 의복을 가지고 그 옷을 열 두 조각으로 찢은 다음에 열 조각을 여로보암 왕에게  바친다. 
이것은 이스라엘 왕국이 잠시 후에 북방 이스라엘과 남방 유다로 갈라지고,
북방 이스라엘 왕국에는 10지파가 따라갈 것이며,
나머지  두 지파는 남쪽에 유다에 속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상징하기 위한 표적이었다.

예레미야 27장 1절과 2절을 보면 하나님이 어느 날,

예레미야 선지자를 부르셔서 이상한 행동을 명령하셨다. 
"예레미야야!" "네  하나님." "너 밧줄을 몸에 감고 멍에를 네 목에다 걸고 거리를 돌아다녀라!"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해서 커다란 메시지를  전달하시려는  것이다. 
“여러분! 나는 이렇게 밧줄을 칭칭 감고 목에 무거운 멍에를 걸고 노예처럼 걷고 있지요? 
우리 민족이 잠시 후에 이렇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바빌로니아에게 포로로 끌려갈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민족은 노예가 될 것입니다”.  라고 말씀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예수님이 어느 날 지나가던 길가의 무화과나무를 보고 저주하신, 

이 사건을 통해서 전달하시려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것일까?

첫째로, 예수님 자신이 누구냐? 하는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고자 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길거리를 지나가다 나무더러  “나무여! 열매를 맺지 못할지어다”했더니,
나무가 말을 들었다는 것이다. 도대체 이 분이 누구시기에? 
이 분이 한 마디 말하면 나무도 복종하는 이 분, 이 분이 도대체 누구냐 하는 것이다.
그는 바로 이 나무를 만드신 분이요, 그리고 나무를 다스리는 분이요 ,
그리고  나무가 창조주의 기대를 저버렸을 때 그 나무를 심판할 수 있는 분이다.

예수께서는 배를 타고 가다가 파도가 일어나니까,
'파도여,  바다여 잠잠할지어다' 했더니, 파도도 바람도 이 분에게  복종했다. 
그 때 사람들이 물었다.
'도대체 저분이 누구냐? 저 분이 뉘시기에 바람과 파도도 복종하는가?'(마 8:27)
바람과 파도를 만드시는 분, 그리고 이것을 다스릴 수 있는 분,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무화과나무를 향해서 심판하시던 그 분이 바로 나를  지으신 분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한다.
내 인생이 그 분의 의도대로 되지 않을  때 나를 심판할 수 있는 분, 
그는 창조자요  심판자인 것을 분명히 믿어야 한다. 

두 번째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사건을 통해서
내용 없는 형식뿐인 종교 의식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서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 민족을 비유하는  상징으로 많이 씌여졌다. 

그런데 이 무화과나무가 어떤 상태에 있었는가? 잎파리가 무성하게 있었다. 그런데 열매가 없었다.

이파리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 
그것이 그 당시의 이스라엘  민족, 더 정확하게 말하면 유대교의 상징이었다.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의 상태가 바로 껍데기만 있고 내용이 없었던 것이다.
잎사귀만 무성했지 열매가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어쩌면 오늘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닌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열심히 예배를 드린다.  찬양도 잘 부른다. 설교도  열심히 듣는다.
그런데 예배에 따른 변화가 없다. 예배의 잎은 무성한데 예배의 열매가 없다.
예배를 잘 드리는 것도 참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배를 드렸기 때문에 내 삶이 어떻게 달라지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참된 예배를 드렸냐는 것은  예배 시간에만 보아서는 모른다.
예배가  끝나고 나가면서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내가 먼저 인사해야지 한다.  내가 먼저 봉사해야지 한다.
내가 먼저 용서해야지 한다.  내가 이해해야지 한다. 내가 참아야지 한다.
내가 먼저 순종해야지 한다. 이것이 신앙생활의 열매다.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그리스도인답게, 하나님의 백성답게, 주어진 책임을 성실하게 감당하고, 

빛을 드러내고, 세상의 소금으로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 나타나야 한다.
그것이 없다면 잎사귀뿐인 무화과나무나 마챤가지다. 
하나님이 보시면서, “너는 허구한 날 잎사귀만 달고 있구나.  열매가 없구나“ 하시지 않겠는가?

중요한 것은 신앙의 본질이다.  형식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내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 결과로써 내 삶을 통해서 얼마나 하나님 앞에 올바른 삶을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내용 없는 형식뿐인 종교, 그것으로는 사회를 변화시킬 수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 종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임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다.

무화과나무라는 것은 시각적으로 별로 아름다운 나무가 아니다. 
이것은 목재나 건축용으로도 적합한 나무가 아니다. 
무화과나무는 꼭 한 가지 목적을 위해서만 존재한다. 열매를 위해서만 존재 의미가 있다.
열매가 없으면 불쏘시개 깜으로 밖에 쓸 수 없는 나무다.

신앙생활의 길고 짧은 것이 문제가 아니다. 교회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느냐도 문제가 아니다.
크리스챤들이 존재하는  목적, 하나님의 백성들이 존재하는 목적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의 열매를 풍성히 맺고, 그 열매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 땅에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는 것이다.

 

(옹달샘)

'골방 2 > 마가복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장 큰 계명  (0) 2020.09.16
하나님, 나, 그리고 예수님  (0) 2020.09.14
행복한 사람  (0) 2020.09.08
무엇을 원하는가?  (0) 2020.09.05
한 청년의 오해  (0) 2020.09.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