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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방 2/마가복음

행복한 사람

by ongdalsem 2020. 9. 8.

 

마가복음 111-10

 

누가 행복한 사람인가?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가?,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가? 누구와 함께 살아야 하는가?

이것을 해결한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본문은 예수께서 유월절을 엿새 앞두고,

군중들의 환호를 받으며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시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감람산 인근 베다니에 이르러서, 제자 중 두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건너 마을로 내려가면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새끼가 한 마리 있을 것이니,

이리로 끌고 오되, 왜 나귀새끼를 끌고 가느냐고 누가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래서 제자들은 그렇게 했고, 예수께서는 그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셨다.

 

이것은 이미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이었다.

이 사건이 있기 500여 년 전에 이미 선지자 스가랴를 통해서 예언된 것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9:9)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하신 일이 하나님의 때에 이루어진 것임을 말해주는 사건이다.

 

세상의 왕이나 대통령이 한번 행차하려면 절차가 복잡하다. 권위를 세워야 한다.

방탄 장치가 된 리무진을 타고 움직인다.

언젠가 요한 바오로 2세가 외국을 방문할 때에도,

이상하게 특별히 제작한 방탄차를 타고 다니는 것을 보았다.

 

어느 나라에서 국빈을 맞을 때는 공항 비행기 트랩을 내리는 곳에서부터 붉은 주단이 깔린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왕이시며 만 왕의 왕으로 오신 예수는,

못생긴 나귀새끼 위에 걸터앉아 예루살렘 성안으로 들어가고 계시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무턱대고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그 계획을 이루시고자 오신 것이다. 예수는 유월절 어린 양으로 오셨다.

예수님은 나귀가 있는 것도 아셨다. 그가 지으셨기 때문이다.

 

나귀새끼 한 마리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면 드려야 한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하는 것이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11:36) 

 

그리스도인의 행복은 하나님이 찾아 주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찾으셨던 나귀처럼, 보잘 것 없는 나를 불러주셨다는 사실이 행복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래서 찬송할 수 있는 것이다'지극한 그 은혜 내게 넘쳐, 날 불러 주시니 고마워라'.

 

아무 내세울만한 공로가 없음에도 불러 주셨다.

못났음에도 불구하고, 죄 투성이 임에도 불구하고, 찾아와주셨다.

이유가 있다면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셨기 때문이,( 1:5)

'그리스도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렇게 된 것이다.(엡 1:7)

 

하나님 편에서는 그 기쁘신 뜻대로우리를 예정하시고,

택함 받은 내 편에서는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자녀가 된 것이다.

어리고 못 생긴 새끼나귀 같은 나를 찾아주신 것이 하나님의 은혜다.

 

그리스도인의 행복은 하나님을 위해 일하게되었다는 것이다.

내가 누구에게 쓰임 받느냐 에 따라서 그 인생이 달라질 수 있다.

마치 칼을 사용할 때에 그 칼을 누가 잡고 쓰느냐에 따라서,

그 결과는 엄청난 차이가 날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똑같은 칼이지만, 그 칼이 요리사에게 잡히면 아름답고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내고,

강도의 손에 잡히면 사람을 해치는 칼이 되고 마는 것이다.

 

지금 누구의 손에 잡혀 쓰임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바라건대 마귀나 세상 어떤 것에게 잡혀 쓰이지 않고, 하나님께 잡혀 쓰여지는 삶을 살게 되기를 바란다.

몬문 3절에, '주께서 쓰시겠다 하라'했다.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신다는 것이 복이다.

 

그리스도인의 행복은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 쓰임을 받을 때에 놀라운 축복이 그에게 임했다.

얼떨결에 예수님을 자기 등에 태우고 가는 나귀새끼가 생각해 본다.

자기가 가는 곳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어서 겉옷을 길에 펴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나무 가지를 베어 길에 펴기도 했다.

 

그리고는 경호원처럼 자기 앞에 호위해가고, 뒤에도 따라온다.

그냥 가는 것이 아니라 호산나, 호산나소리를 지르면서 같이 가는 것이다.

원래 동그란 눈이 더 동그래졌다.

세상에 이런 영광스러운 일이! 어디 다시 있겠는가? 꿈만 같았을 것이다.

 

허구한 날 울퉁불퉁 발바닥이 아픈 자갈길을 다녔는데,

지금은 보통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벗어놓은 옷 위로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많은 인파들의 환영과 경호를 받으면서 걸어가고 있자니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왜 그 나귀가 그러한 영광을 받게 되었는가?

그 이유는 오직 하나, 바로 예수님 때문이었다.

비록 약한 체구였지만 예수님을 태우고 가니까 예수님이 받으시는 영광에 동참하게 되었다.

무겁고 피곤했지만 예수님을 자기 등에다 모시고 묵묵히 참고 걸어가니,

그 영광을 자기도 누리게 되었다. 얼마나 귀한 일인지 모른다.

 

하나님을 모시고 살면 이런 영광의 축복이 따라온다.

좀 힘이 들고 괴롭더라도 참고 묵묵히 걸어가면,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태어나서 아직 아무도 태워보지 보지 않은 나귀새끼가,

예수님을 태우고 가자니 다리가 떨리고 곧 쓰러질 것만 같았고,

자기 자신으로서는 너무나도 감당하기 힘들었을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꾹 참고 걸어갔다. 좀 쉬고 싶었지만 묵묵히 잘 걸어갔다.

 

온 우주를 다스리실 왕이면서도 나귀 한 마리를 쓰실 계획을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이,

나를 쓰실 계획도 가지고 계신다. 나의 일생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 들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내가 그저 우연히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가 아니다.

세상 사람들은 노래한다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노래한다.

나의 갈 길 다 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어려운 일 당한 때도 족한 은혜주시네

 

인생의 성패를 무엇으로 평가할 것인가? 이 세상에서 외적인 성공으로 평가할 것인가?

만약에 예수께서 이런 것을 해결하실 왕으로 오셨다면,

많은 군대를 앞세우고 탱크를 앞세우고 입성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다.

 

여기에 놀라우신 하나님의 뜻이 있다. 왜 예수께서는 나귀새끼를 타셨는가?

성경은 말씀한다.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하나님의 나라를 다스리시는 자는 겸손한 자다. 겸손히 하나님의 뜻을 살피시는 자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내가 어떻게 살기를 하나님은 원하시는가?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을 살피면서 그 뜻대로 내가 쓰여지고 그 뜻대로 살아가고 있는가?

그래서 이 세상을 마감하고 언젠가 하나님을 만날 때

과연 후회 없이 내 인생을 살았다는 고백을 할 수 있는가?

 

예수께서는 양들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다고 하셨다.(10:10)

그래서 예수를 믿으면 인생이 더욱 풍성해진다.

모진 인생 죽지 못해서 허우적거리며 사는 것이 아니라하루하루의 삶을 감사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나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나귀새끼 한 마리, 세상에서는 알아주지도 않고 귀하게 여기지도 않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귀한 것으로 사용하셨다.

내가 보기에 나는 초라하다. 가진 것도 없다. 연약하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비록 세상이 알아주지 아니하고, 사람이 보기에 초라해도,

하나님은 나를 알아주시고 귀하게 여기시는 것이다.

 

세상사람 날 부러워 아니하여도 나도 세상사람들 부럽지 않네

하나님의 자녀 된 것 생각할 때에 할렐루야 찬송이 저절로 나네

하나님께 쓰임 받는 행복한 삶이 되기를 바란다.

 

(옹달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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