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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방 2/사도행전

마지막 한 마디

by ongdalsem 2020. 7. 31.

사도행전 754-60

  베드로가 예수를 따라 다닌지도 3년이나 되었다. 그 동안 예수가 어떤 분인가는 알만큼 알았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베드로는 이것을 분명히 알았다. 그래서 예수께서 베드로를 보고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고 물으셨을 때, 주저 없이 대답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16) 감히 아무도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베드로가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 하심으로 가능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날은 참 이상한 날이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만 중요한 시점에서 베드로는 참으로 큰 실수를 하게 되었다. 예수께서 유대인들에게 붙잡혀서 대 제사장 가야바의 집으로 끌려가던 날, 베드로는 멀찍이 뒤떨어져 따라가서 그 집 머슴들과 함께 문간에 앉아 있었다. 어떻게 될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예수에게 침을 뱉고, 주먹으로 치고, 손바닥으로 때리고 하면서, 예수를 죽여야 한다고 소리를 질러 댔다. 그런 중에 어떤 머슴 하나가 베드로를 보고, “너 저 사람과 한 패였지?” 했. 베드로는 깜짝 놀라서, “당신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요?” 하고 시치미를 뗐다.

  조금 있다가 또 한 사람이 나오더니 베드로를 보고 말했니다. “당신 분명히 저 예수라는 자와 같이 있었어!베드로는 속으로 겁이 덜컥 났다. 그래서, 말했다.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요, 난 저런 사람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요. 내가 맹세합니다.조금 있더니 또 다른 사람이 나와서 베드로를 보고 말했다. “당신 분명히 저 예수와 한 통속이야. 같은 지방 사투리를 쓰잖아?” 하는 것이다. 큰일 났다. 꼼짝없이 자기도 붙들려 가게 생겼다. 베드로는 내친 김에 말해 버리고 말았다. “저 저주받을 사람을 내가 어떻게 안단 말이요, 다시 그런 말 내게 하지 마시오!

  어떻게 하다가 이렇게 되었는지 기가 막혔다.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르던 예수를, 저주받을 못 쓸 사람이라고 한 것이다. 그가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고백했던 입으로 그렇게 말한 것이다. 고난 때문이었다. 닥쳐올 신변의 위험이 두려웠던 것이다. 어떠한 형편에 놓여 있든지, 믿음을 지킬 자신이 있는가? 생명 내걸고 예수를 따를 자신이 있는가? 환난이 와도 고통이 와도 오직 주님만 의지하고 나갈 자신이 있는가?

  내 힘으로는 안된다. 내 힘만 의지하면 베드로처럼 실패한다. 순간 순간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야 한다. 하나님의 성령이 충만하심으로만, 모든 환난을 이기고 늘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그 믿음에서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심지가 견고한 자에게 평강에 평강을 더하시는 분이시다.(26:3)

  본문 말씀 가운데 보면, 데반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다가 반대파들에 의해 돌에 맞아 죽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얼굴은 천사와 같이 빛났고, 오히려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것을 보았다.(55-56절) 부활의 주님에 대한 확신이 있는 것이다. 이 확신이 있기에 죽는 한이 있어도 예수를 부인할 수가 없다. 그래서 최초의 순교자가 된 것이다. 스데반은 담대하게 예수를 증거하며 복음을 전하고, 예수를 배척한 유대인들을 향하여 회개하라고 말했다. 저들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림을 받았다. 찔림을 받았다는 것은 잘못한 일인 줄 알았다는 말이다.

  잘못한 줄을 알았으면 회개하고 돌아서야 한다. 뇌우치고 고쳐야 한다. 그런데 세상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변명하려 하고, 합리화하려 하고, 들통 난 것이 분해서 이를 갈면서, ‘너 어디 두고 보자!하고 벼르는 것이다. 스데반의 지적을 받은 저들도 잘못한 줄은 알았지만, 고치려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갈았다.(54절) 스데반을 죽인 자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다. 오히려 더 열심히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었다. 대부분이 산헤드린 공회원들이다.

  문제는 복음을 듣고도 마음을 열지 않은데 있는 것이다. 때로 교회가 어려움을 당한다. 그런데 교회를 어렵게 하는 것은 세상에 있는 불신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 안에 있는 신자들인 경우가 많다. 말씀을 듣고 마음에 찔림은 받았지만, 잘못된 것을 뇌우치고 고치지 아니하면 오히려 원망하고 적개심만 불태우게 되는 것이고, 나아가서 교회를 허는 일에 앞장서게 되는 것이다.

  어떤 가정에서 하루는 수요일이라 온 가족이 모두 교회 저녁 예배에 가려고 준비하고 있는데 마침 손님이 들이닥쳤다. 어쩔 수 없는 형편이 되어서, 가정부에게 혼자서만 교회에 갔다 오라고 해 놓고 손님을 맞았다. 그런데 얼마 후, 교회에서 돌아온 가정부가 집안에 들어서자 마자 엉 엉 우는 것이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주인 내외가 물었다. “아줌마, 왜 그래요? 교회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요?” 가정부가 울면서 말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어요? 내가 잘못한 것이 있으면 직접 말해 주실 것이지, 왜 목사님께 고자질을 해 가지고 나 혼자 교회에 가서 실컷 욕만 먹고 오게 하는 거예요?”

  교회에 갔더니 목사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잘못한 것만 야단치더라는 것이다. 너무 속이 상했다는 것이다. 이 가정부는 설교를 듣는 가운데 찔림을 받은 것이다. 자기보고 말한 것이 아니지만 말씀을 듣는 가운데 자기 양심이 자기를 고발하고 있었던 것이다. 찔림을 받았으면 마땅히 잘못을 뇌우치고 고칠 일이지, 누구를 원망하고 섭섭해 할 일이 아닌 것이다. ‘내가 옳은 줄만 알고 있었는데 말씀을 듣고 보니 정말 나는 나쁜 사람이구나’, ‘내가 이래서는 안되겠구나하고 회개하고 돌아서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사람의 마음의 생각과 뜻을 다 아신다.(4:12) 그러므로, 말씀을 들을 때, 나의 잘못을 깨우쳐 주시는 것을 오히려 고맙고 감사하게 여겨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은혜다. 이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다. 잘못을 깨우쳐 바른 길 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살아야 한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많은 사람들은 마음에 찔림을 받고, “우리가 어찌할꼬?” 하며 회개함으로 구원을 받았다.(2:36-37) 그러나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저 사람들은 오히려 이를 갈면서 스데반을 죽이려고 달려들었다. 뿐만 아니라 귀를 막고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한참 싸우는 사람들을 보면, 대개 상대방의 말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자기 말만 하려 한다. 대화는 듣는데서 이루어진다. 듣지 않으려는 것은 대화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들을 줄 아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이다.

  저들은 스데반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귀를 막고 작당을 해서 스데반에게 달려들어 그를 성밖으로 끌어내고 거기서 돌로 처 죽여 버렸다. 누가 복있는 사람인가? 성경은 복있는 자는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1:1)말씀한. 악한 생각에 함께 하고, 악한 일에 가담하고, 악하게 얻은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그렇게 해서 얻은 것은 복이 아니다.

  세상적으로 말하면 스데반은 참 불행한 삶이었다. 세상에 계시지도 않는 예수 때문에, 그를 증거 한다고 열심을 내다가, 큰 일 한 번 해보지 못하고 군중들의 돌에 맞아 속절없이 죽고 말았다. 정당한 재판 한 번 받아 보지 못했다. 억울하기 이를 데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 스데반의 눈에는 하늘이 열린 것이 보였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여 승천하신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서 스데반을 기다리고 계시는 것이 보였다. 스데반의 마음에는 기쁨이 충만했다. 원망 따위는 없었다. 생각해 보니 정말로 불행한 것은 자기가 아니라, 자기를 돌로 처 죽인 사람들이다.

  그래서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60절) 스데반이 남긴 마지막 한마디였다. 어떤 사람이 혀에 암이 생겼다. 결국 혀를 잘라 버려야 하게 되었다. 그래서 의사가 말했다. "선생님 이제 혀를 자르면 선생님은 다시는 말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꼭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면 수술 들어가기 전에 지금 하십시오." 이 사람이 한참 생각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꿇고 하늘을 바라보면서, "지금까지 말하고 살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하고 나서, "자 어서 자르시오!" 했다고 합니다. 내 인생의 마지막, 그 때가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그 때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스데반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성경 말씀에 보면 그는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고 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었고,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시는 것을 보았다고 말씀한다. 스데반이 성령에 충만했다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그가 어떤 황홀경에 빠졌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서 화평으로 채워진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믿음을 바로 가지면 마음에 화평(和平)이 있다. 예수께서는 나와 하나님을 화목하게 하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기 때문다.(2:14)

  예수님을 바로 보았기에, 스데반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자기를 돌로 처 죽이는 원수들을 위해서 용서를 빌고, 원수를 위해서 기도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 화평을 소유하고 살아야 한다. 그것이 세상의 환난을 이기는 힘이다. 하나님의 화평이 그의 속에 충만했기 때문에, 세상의 형편과는 상관없이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 같이 빛나게 되었던 것이다.

  땅을 보면 이를 가는 사람과, 돌팔매질하는 사람들과, 모든 걱정과 근심이 보인다. 그러나 하늘을 보게 되니 세상이 불쌍하게 보인다. 오히려 매 맞고 죽임을 당하는 자신이 더 평안함을 알게 되었다. 유대인의 격언에, ‘앞도 막히고, 뒤도 막히고, 옆도 막히거든 위를 보라는 말이 있다. 거기에 살 길이 있다. 위를 볼 때, 용서의 마음, 사랑의 마음, 넓은 마음이 생긴다. 그럴 때,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찬송하게 되는 것이다.

  환난이 오고 두려움이 있을 때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평소에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다. 그래야 환란이 와도 고통이 와도, 그것과 상관없이 하나님을 찬송하며 살 수가 있는 것이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보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스데반을 영접하신 것처럼, 나를 영접하시기 위해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신령한 눈으로 보아야 한다. 그래서 늘 새 힘을 얻고 살아야 한다. 언젠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 ‘아버지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나를 핍박하던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하고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옹달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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