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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방 2/사도행전

모퉁이의 머릿돌

by ongdalsem 2020. 7. 29.

사도행전 4장 5-12절. 

  어느 날 기도 시간이 되어, 베드로와 요한이 함께 기도하러 성전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마침 그 때에 사람들이 앉은뱅이 한 사람을 둘러메고 와서 ‘미문’이라고 하는 성전 문 앞에 내려놓았다. 이 앉은뱅이는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게 된 사람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때만 되면 이 앉은뱅이를 메어다가 성전 앞에 두고 성전에 오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도와주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를 이미 사십 년이나 되었다. 어느 날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하는 것을 보고 이 앉은뱅이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손을 앞으로 내밀고 베드로와 요한 에게 도움을 청했다. 베드로와 요한이 구걸하는 소리를 듣고 눈여겨보는 가운데, 베드로의 마음에 성령이 역사 하셨다. 돈 몇 푼 주어 가지고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을 알았다. 그에게는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이 필요했던 것이다. 깨닫는 순간 베드로는 담대하게 말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행3:6)

  그리고는 그 앉은뱅이의 오른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그랬더니 그 앉은뱅이가 발목에 힘을 얻어서 걷고 뛰고 하면서 성전으로 들어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렇게 되자 거기에 모였던 군중들의 관심이 베드로와 요한 에게로 쏠리게 되었다. 베드로를 만나기 전까지 이 앉은뱅이는 소망이 없었다. 날마다 그렇게 구걸이나 하다가 한 평생 마칠 것이었다. 죽지 못해 사는 것이다. 무슨 낙이 있었겠는가? 그저 먹을 것만 있고 배만 부르면 그만인 삶이었다. 사람이지만 사람 같지 않은 삶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아담 이후의 인생들의 모습이다. 참 소망이 무엇인지 모른다. 왜 사는지도 분명치 않다. 무엇을 하고 살아야 참으로 가치 있는 삶을 사는 것인가도 관심이 없다. 우선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그 길이 사는 길인지 죽는 길인지도 생각하지 않고 그리로 달려 가는 것이 인생의 모습이다. 이것이 앉은뱅이 인생이다. 이것은 영적으로 죽은 인생이다. 비록 겉보기에는 멀쩡해도 속은 썩은 냄새가 나는 것이다. 

  요한 계시록에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가 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함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계3:18) 참 진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소망이 없던 앉은뱅이는 베드로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사람이 바뀌었다.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시는 사람도 이미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아 인생의 목표가 바뀌어진 것임을 알아야 한다. 바뀌어야 올바른 그리스도인이다. 죄로 말미암아 마땅히 죽을 수밖에 없는 몸이 그리스도의 피로 살게 되었다. 앉은뱅이 같이 매사에 희망이 없고 낙이 없어 배(服)로 신(神)을 삼던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인하여 기뻐하며 천국의 선한 소망을 가지고 오늘을 올바르고 진실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다.

  한 사람이 예수를 믿고 거듭났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사건을 말하는 것이다. 앉은뱅이가 발목에 힘을 얻어 일어나서 걸으며 새 삶을 시작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앉은뱅이가 걷고 뛰며 하나님을 찬송한 것처럼, 하루하루의 삶 가운데 항상 함께 하시는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기쁘게 찬양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베드로와 요한은 참으로 선한 일을 했다. 소망 없이 사는 자에게 소망을 주었다. 삶의 목표가 분명치 않았던 사람에게 살아야 하는 의미를 주었다. 그리스도인들은 마땅히 이 은혜를 감사하며, 또한 이것을 이웃에게 나누어주어야 한다. 절망 가운데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를 전해야 한다. 저들에게 소망을 주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 

  베드로와 요한이 이렇게 선한 일을 했는데 문제가 생겼다. 관원들과 대 제사장들과 알렉산더, 요한, 및 대 제사장의 문중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베드로에게 물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7절) 좋은 일을 한다고 칭찬만 듣는 것이 아니다. 세상은 그렇다. 누가 좋은 일을 하면 반드시 시기하는 사람이 있다. 자기에게 존귀와 영광이 돌아와야 하는데 그것이 딴사람에게로 가면, 그것을 참지 못하는 것이다.  

  본문의 배경이 되는 당시의 유대인 기득권 층의 입장에서 볼 때에 베드로와 요한은 별볼일 없는 사람들이다. 목수의 아들인 예수라는 사람을 무슨 신인 것처럼 따라 다니더니, 그 예수도 십자가에 달려서 죽고 말았는데, 뭘 한다고 돌아다니는지 한심한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하찮은 무리증의 한 사람인 베드로가 사십 년이나 구걸로 세월을 보내던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웠으니,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 일은 거룩한 제사장들이나 할 일이지 제가 뭔데 주제넘게 설치고 다니느냐는 것이다. 기득권층인 자기들이  받아야 할 영광이 베드로에게 돌아가니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저들은 무식한 베드로가 백성들을 가르치는 것도 싫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그가 부활하셨음을 증거하는 것도 싫었다.(행 4:2) 그래서 시비를 걸고 있는 것이다. 여차하면 공회에 넘겨서 사회적으로 매장시킬 수도 있다. 어느 시대나 권력의 실세를 가지고 있는 자들은 그들에게 도전하는 자들을 그냥 두려 하지 않는다. 

  베드로는 이런 시비조의 질문을 받고 오히려 더욱 성령이 충만해서 저들에게,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그 예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그 예수의 권세로 하는 것’이라고 담대하게 말했다.(10절) 성령이 충만하면 비 진리 앞에서 담대해지게 된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순교도 성령이 충만할 때 가능한 것이다. 스데반 집사가 유대인들의 던지는 돌에 맞아 죽을 때도 오히려 성령이 충만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행 7:55) 

  성령이 충만하면 하나님의 눈치를 볼지언정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게 되는 것이다. 성령이 충만하면 바로 깨닫고 바로 말하게 되는 것이다. 베드로를 보고, 네가 뭔데 그런 일을 하느냐고 시비를 걸던 무리들이 결국 베드로를 보고 말했다. “다시는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행4:18).  

  이 말을 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4:19-20) 세상에는, 내게 유익이 되면 하나님의 말씀쯤은 뒤로 밀어 버리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잊어버리고, 떡만 있으면 살수 있는 것으로 생각할 때, 그렇게 되는 것이다. 떡을 위해 말씀을 버리는 것이다. 모두 부질없는 일이다.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것이 되겠느냐?”(눅12:20) 이것을 바로 깨달아야 한다. 그래서, 분명한 말씀의 기초 위에 믿음을 세워야 한다. 본문 가운데 아주 중요한 두 가지 말씀이 있다. 하나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천하 인간에 구원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는 것이다. 

  모름지기 집은 기초가 튼튼해야 한다. 머릿돌이 잘 놓여져야 하는 것이다. 돌도 돌 나름이다. 초석으로 쓰는 돌은 좋은 것이어야 한다. 아무 돌이나 쓰지 않는다. 건축자들은 돌을 볼 줄 아는 눈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예수를 이스라엘 구원의 초석으로 주셨는데, 저들이 알아보지 못하고 버렸다. 속을 보지 않고 겉만 보았기 때문이다. 세상을 구원할 메시야가 초라한 모습일 수는 없다는 것이 저들의 생각이었다. 

  출신 지역도 문제가 되었다. 예수를 만난 빌립의 말을 들은 나다나엘이 말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1:46) 사람은 외모를 보고, 출신 지역을 본다. 그러나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중심을 보신다.(삼상 16:7, 마 22:16) 겉모양만 좇다 보면 때로 귀중한 것을 놓치는 수가 있다.  

  믿음은 좋은 프로그램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훌륭하게 지어진 예배당에서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믿음의 기초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의 구주라고 하는 확실한 고백이 필요한 것이고,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그 외에, 성도들이 할 수 있는 구제나, 봉사나, 선교는,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감사함으로 하게 되는 것일 뿐이다. 믿음의 올바른 기초를 세워야 한다. 그래야 환난 날에 넘어지지 않는다. 

  예수 믿어 건강하기만 바라면, 병들었을 때에 믿음에서 실족하게 된다. 예수 믿어 물질 축복 받기만 원하면, 실패했을 때 믿음에서 넘어지게 된다. 온전한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이다. 그가 사는 길로 내가 가야 하고, 그가 죽어야 하는 길이면 나도 함께 죽어야 하는 것이다. 믿음의 기초를 분명히 세워야 한다. 엘리야는 갈멜산 꼭대기에서 외쳤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왕상18:21)   

  예수 그리스도가 머릿돌이 되어야 한다. 다른 어떤 것도 이를 대신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어떤 것이 있으면, 이미 기초가 잘못 놓여진 것이다. 건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머릿돌을 놓는 일이다. 머릿돌이 잘못 놓이면 모든 것이 뒤틀린다. 가정에서는 가장이 머릿돌이다. 가장이 바로 서야 가정이 바로 서게 된다. 교회에서는 목사가 바로 서야 한다. 장로, 권사가 바로 서야 한다. 집사가 바로 서야 한다. 기초가 되는 중직 자들이 든든히 서 있지 못하고, 제 자리를 못 지키고 우왕좌왕하게 되면 교회가 어지러워진다. 나 하나가 하나님의 교회의 초석인 줄 알고 든든히 서 있을 때, 온 교회가 평안하게 되는 것이다. 

  본문은 또 말씀하고 있다. “천하 인간에 구원 얻을만 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음이라.”(12절) 오늘 날 많은 사람들이 종교 다원주의를 말한다. 구원은 예수만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혹 어떤 사람은 말한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고집쟁이요 배타적이라고. 다른 종교는 안 그런데 유독 기독교만은 말이 안 통한다는 것이니다. 진리가 타협적일 수는 없는 것이다. 

  어느 날 방송을 듣는 가운데, 아주 흥미 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지난 크리스마스 때 한 스님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성탄절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하더라는 것이다. 언뜻 보면 참 아량이 넓은 말 같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이다. 믿지도 않는 예수 이야기를 왜 하는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이 없다. 이것이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다. “천하 인간에 구원 얻을만 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확실히 믿고, 확실히 전하며 살아야 한다. 

(옹달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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