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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방 2/사도행전

무엇이 문제인가?

by ongdalsem 2020. 7. 29.

사도행전 533-34

  스님 한 분이 동자승을 데리고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어떤 사람이 그에게 꿀 한 항아리를 선물로 주었다. 스님은 그 꿀 항아리를 벽장 안에 숨겨 놓고 아무도 몰래 혼자서만 조금씩 꺼내 먹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만 동자승(童子僧)에게 들키고 말았다. 동자승이 물었다. “스님은 뭘 그렇게 혼자서 잡수십니까?” 스님은 둘러댔다. “응 이것은 약일세, 아이들은 잘못 먹으면 죽는 약이지.” 다음 날 동자승은 결심을 했다. ‘내가 죽으면 죽으리라!’ 그리고는 스님이 안 계신 틈을 타서 벽장문을 열고 꿀 항아리를 꺼내어 뚜껑을 열고 손가락으로 조금 찍어서 맛을 보니 너무 너무 맛이 좋았다. 그래서 조금씩 맛을 보다가 내친 김에 모두 먹어 버리고 말았다. 항아리에 꿀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먹을 때는 몰랐는데, 다 먹고나서 생각하니 큰일 났다. 조금 있으면 스님이 돌아와서 꿀 항아리를 꺼낼 것인데, 이걸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대책이 서지 않았다. 궁리 끝에 동자승은 스님이 애지중지(愛之重之) 아끼고 귀하게 여기는 벼루를 방바닥에 내동댕이를 쳐서 깨 버렸다. 그리고는 제 방으로 들어가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웠다. 얼마 후에 스님이 돌아와서 벽장문을 열고 꿀 항아리를 꺼내서 뚜껑을 열고 보니, 이게 어찌된 일인가? 꿀이 조금도 남지 않았다. ‘필시 동자승 짓이렷다’ 생각하고는 혼을 내 줄 요량으로 동자승을 불러도 대답이 없다. 궁금해서 옆방으로 가보니 동자승이 이불을 뒤집어쓰고 꿍꿍 앓고 있었다.

  스님은 걱정이 돼서 물었다. “어디가 그렇게 아프냐?” 동자승이 대답했다. “스님, 제가 그만 실수를 해서 스님이 아끼시는 벼루를 깨뜨렸습니다. 죽을죄를 졌습니다. 보나마나 쫓겨나게 생겼으니 어찌합니까? 마침, 저 항아리에 있는 것을 먹으면 죽는다는 스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얼른 죽어 버리려고 그 안에 있는 것을 죄다 먹어 버렸습니다. 스님 저는 이제 죽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동자승의 말을 들은 스님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내가 속이면 나도 언젠가는 속게 되어 있다. 지도자가 거짓말하면 머지 않아 모든 사람들이 아무 거리낌없이 거짓을 말하게 될 것이다.

  성경에는 많은 이적(異蹟)과 기사(奇事)가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 당시에도 이런 일들이 있었고,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에도 이런 표적(標的)이 있었다. 본문 사도행전 5장에는 엄청난 사건이 하나 기록되어 있다.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교회가 탄생하고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아름다운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어 가는 중이다. 성도들이 모두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서,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의 재물을 제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없었다.(행 4:32) 그런 가운데, ‘바나바’라는 사람이 성령이 충만해서 자기가 소유하고 있던 밭을 팔아서 사도들 앞에 가져갔다. 모두 놀라워했다. 많은 칭찬을 받았을 것이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집으로 돌아가서 자기 아내 ‘삽비라’와 상의한 후에, 자기 소유 재산을 전부 팔아서 사도들에게 드리기로 했다. 시작은 잘 했는데 문제가 생겼다. 팔아 놓고 보니 욕심이 생겼다. 그래서 재산 판 값을 절반쯤 떼어서 감추어 놓고 베드로 앞으로 가지고 갔다. 자기와 자기의 아내 두 사람만 아는 일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베드로가 이 사실을 금방 알아냈다. 베드로가 아나니아를 보고 말했다. “어찌하여 네 속에 사단이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이는 네가 사람을 속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속인 것이다.”(5:3-4) 베드로의 말이 떨어지자 말자 아나니아가 그 자리에 쓰러져서 혼이 떠나 버렸다. 사람들은 시체를 메고 장사하러 나갔습니다. 문제는 거기서 그친 것이 아니다.

  세시간 쯤 후에 그의 아내 삽비라가 들어왔다. 베드로가 다시 물었다. “네 땅값이 이것뿐이냐?” 그 여인이 말했다. “ 예, 전부 그것뿐입니다”. 베드로가 다시 말했다. “너희가 어찌하여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이 너도 메고 나갈 것이다.” 그 순간 삽비라도 혼이 떠났다. 졸지에 생긴 일이다. 너무나 황당한 일이다.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재산을 팔아 바쳤는데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는 것인가? 하나도 안 바친 사람에 비하면 얼마나 잘한 일인가? 그런데 이건 하나님이 너무 과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을 것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을 한다. 열심을 낸다. 그런데 그것을 왜 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다. 무엇을 위해서 열심을 내느냐 하는 것이다. 이것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내가 구제를 한다. 봉사를 한다. 왜 무엇 때문에 하느냐 하는 것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이 주는 교훈을 통해서 이것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은 그의 뜻을 말씀으로 표현하신다. 그런가 하면 때로는 사건을 통해서 말씀하시기도 한다.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그 말씀’을 바로 들어야 한다. 그래야 이 말씀을 은혜로 받을 수 있다.

  하나님이 친히 세우신 하나님의 교회에는 성령의 역사 하심이 함께 하신다. 그런데 이 사실을 바로 깨닫지 못하면 성령을 기만(欺瞞)하는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본문에 나타난 사건의 원인은 저들이 성령을 속인데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만홀(漫忽)히 여기심을 당하시지 않으신다. 멸시 당하시는 분이 아닌 것이다. 세상에서 사람을 속여도 문제가 되는데 하물며 하나님을 속인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실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6:9) 하고 기도하라 하셨다. 성도들에게서는 말에서든지 행함에서든지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이제 막 교회가 시작되어서 성령의 역사 하심을 따라 뜨겁게 봉사하며 신앙 공동체를 이루어 나가고 있는 마당에, 벽두에서부터 거짓이 자리를 잡게 되면 안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중에는 걷잡을 수가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것을 경계하신 것이다. 물론 교회 공동체 안에는 여러 가지의 모습들이 있을 수 있다. 거짓도 들어올 수 있다. 교회를 넘어뜨리려는 사단의 계교(計巧)는 어느 곳에나 항상 있기 때문이다. 비록 그렇다고 할지라도 이 기만과 술수(術數)가 교회 안에서 다반사(茶飯事)로 일어나고, 용인(容認)되어서는 않되는 것이다. 위선(僞善)이 자리를 잡아서는 않되는 것이다. 세상에서 내 위치를 견고히 하고, 세상에서 내 명예를 추구하기 위해 복음을 도구(道具) 삼아서는 않되는 것이다.

  저들은 겉으로만 다 바친 것처럼 하여서 사람들의 칭찬도 받고, 하나님을 속여서 자기의 실속도 챙기려는 외식적(外飾的))인 모습을 보인 것이다. 하나님이 모르실 줄로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사람은 외모(外貌)를 취하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 하나님의 일을 빙자해서 사람의 칭찬을 받으려 해서는 않되는 것이다. 순수하게 하나님의 영광만을 생각하며 구제도 봉사도 할 것이다.

  어쨌던, 이 사건을 통해서 사람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의 교회는 거룩함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서 사단의 계획을 간파하고 물리쳐야 하는 것이다. 본문에도 보면 이 사건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다.(11절) 믿음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하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믿는 것이다. 악은 반드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하나님 앞에서 아무렇게나 행동하지 않게 된다. 그래야 복음이 바르게 전해지는 것이다. 한쪽만 생각하면 온전한 복음이 아니다. 이렇게 되니까 사도들은 더욱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게 되었다. 하나님이 이 사건을 일으키신 것은, 사도들로 하여금 더욱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할 수 있도록 권위를 부여해 주시기 위함인 것이다.

  본문 말씀 가운데,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29절) 하는 말씀이 있다. 무슨 일을 하다보면 때때로 사람의 눈치를 보게 되는 수가 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을 때 오히려 사람의 눈치를 보게 된다. ‘순종한다’는 말은 ‘최우선적인 것으로 여기고 따른다’는 의미가 있다.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마음에서 하는 일이라면 거리낄 것이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 일을 먼저 해야 하는 것이다.

  혹 저 사람의 마음에 들지 아니하게 되면 불리하지, 이러다가 내가 외톨이 되는 것 아닌가, 하는 등등의 생각들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지 못하는 일이 있는 것이다. 성령의 능력으로 이런 문제들을 해결해야 한다. 거기에 참 자유함이 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용감해지지만, 사람을 바라보고 사람을 의지하려 하면 비겁해 진다. 하늘 한 번 쳐다보고 사람 한 번 쳐다보고, 그렇게 할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담대한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그럴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실 것이다.

  오늘 주신 말씀 가운데 한가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42절) 하는 말씀이다. 베드로와 요한을 위시해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에게는 핍박이 많았다. 툭하면 감옥에 갇혔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옥문이 열려서 나오기는 했지만 그것도 잠간이고, 다시 붙들려서 채찍으로 두들겨 맞고 다시는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는 엄포를 듣고는 했다.(18절, 40절) 이상한 일이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도들인데 왜 자꾸 어려운 일이 생기는가? 감옥에서 풀려났으면 다시 감옥에 가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 아닌가? 병들었던 몸이 하나님의 은혜로 고침을 받았으면 다시는 병들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닌가? 여기서 한가지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성경에 나타난 기적이나 이적은,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사건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성도들의 생명을 책임지고 계시는 것이며, 그 하나님이 오늘도 우리와 함께 계심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일을 한 번 경험하게 되면, 그 후에는 질병 드는 것도, 실패하는 것도, 죽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받은 백성은 언제 어디서나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게 되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하고 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하고 찬송하며 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사도들이 그렇게 혹독한 핍박을 받으면서도, 집에 있든지 성전에 있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라 가르치고 전도하기를 쉬지 않은 것과 같은 것이다. 저들은 매를 맞으면서도 기뻐했다.(41절) 그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바울도 말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몸에 채우노라.”(골 1:24)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교회의 평안을 위해서라면, 내가 받는 괴로움 쯤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예수께서도 말씀하셨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마 5:10) 이 믿음으로 앞에 있는 모든 고난을 다 이기고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모든 삶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고,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며 살아야 한다. 봉사할 수 있는 것도 은혜요, 수고할 수 있는 것도 특권이다. 하고 싶어도 못하는 사람이 많다. 기회가 주어 졌을 때, 봉사하고 기회가 주어졌을 때, 수고할 것이다. 하나님을 위해 수고하고 봉사하는 심령에 반드시 상급이 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償)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옹달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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