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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방 2/마태복음

공중의 새 땅의 백합

by ongdalsem 2021. 4. 21.

"마태복음 6장 25-29절"

 

예수님은 왜 제자들에게 황소를 보라, 저 큰 소나무를 보라하시지 않으시고,

"새를 보라, 백합화를 보라하셨을까?

공중의 새를 보라 들의 백합화를 보라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 담겨진 깊은 뜻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예수님은 일상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을 가르쳐 주셨다.

 

우리의 심령이 죄로 인해서 어두워지지 않았다면, 우리 눈에 보이고, 우리 귀에 들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 물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찾을 수 있고,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죄로 인해서 우리의 심령의 눈은 어두워지고, 감각은 무디어졌다.

우리의 영성은 너무도 둔해졌다.

 

그래서 보려고 애써도 보이지 않고, 들으려고 귀를 빼어도 들어오는 하나님의 소리가 없다.

뿐만 아니라 다른 것을 보고, 다른 소리를 듣는 잘못을 저지르게 되었다.

한 송이의 백합화를 보면서, , 아름답구나! 하나님의 솜씨가 어쩌면 저렇게 오묘하실까?

이런 아름다운 꽃을 만드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가! 하는 생각을 하는 경우가 드물다.

꽃이 피었구나, 곱구나, 아 그렇구나, 하는 정도다.

 

예수님은 모든 피조물을 말씀의 예화로 사용하셨다.

본문에서는 백합화와 새를 소재로 하셨다.

하나님의 뜻을 전해주는 것은 이 두 가지만이 아니다.

하늘을 보아도, 산을 보아도, 흐르는 물을 보아도, 바람 소리를 들어도, 쏟아지는 비를 맞으면서도,

이름 없는 들풀을 보면서도 우리는 하나님을 마날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을 생각을 할 수가 있으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다.

 

이것을 자연계시라고 말한다.

이 자연계시는 모든 사람들에게 똑 같은 조건으로 주어진다.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을 구별하지 않고, 동서양을 구분하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은 그 속에서 놀라운 하나님의 비밀을 캐내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우상화하여 숭배하고, 그것들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한다.

 

본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금도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보잘 것 없는 저 백합화도 아름답게 만드시고 보살피시며,

조그만 새 한 마리도 돌보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해 보면,

인간들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의 깊이를 알 수 있는 것이다.

 

동물들은 사는데 필요한 먹이와 생식 본능외에는 관심이 없다.

그러나 사람은 근본적으로 일반 동물과는 다르게 영적인 존재로 지어졌다.

사람에게는 감정과 이성이 있을 뿐 아니라 종교성이 있다.

신학을 공부하는 동물도 없고, 주일마다 예배를 드리는 동물도 없다.

 

인간은 신앙적인 존재로 지어졌다.

동물에게나 인간에게나 귀소본능(歸巢本能)이리는 것이 있는데,

동물은 제 굴을 찾아가는 것이요, 인간은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살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다만 이것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이제는 인간이 못할 것이 없는 시대가 되었다.

유전공학으로 인간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과학자들이 하나님에게 말했다.

하나님,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필요 없습니다, 그만 이 지구상에서 떠나주세요.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자 그러면 우리 어디 한번 시험을 해 보자.

맨 처음으로 돌아가서 아담을 만들 때부터 한번 같이 시작해 보자.

과학자들이 말했다. “그럽시다.

 

그리고는 과학자들이 흙을 반죽해 가지고 사람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고 계시던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그 흙은 내가 만들어 놓은 재료야, 자네들은 자네들대로 따로 재료를 만들어 쓰게!

시합은 과학자들의 판정패였다

 

가장 어리석은 것이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더 어리석은 것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염려와 근심에 빠져서 사는 것이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신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25)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거꾸로 생각하며 살 때가 있다.

 

염려와 근심은 우리의 건강을 해치는 주적이다.

마음의 즐거움은 야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17:22)

염려는 불신앙이다. 그러므로 불신앙적인 생각을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모든 일에 의심하고 불안해 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보다 중요한 것을 먼저 생각하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가지는 걱정이 대개 어디서 오는가?

오늘보다 내일 더 잘 먹고 더 잘 입으려것 때문이다.

사실 더 좋은 내일을 생각하며 염려하는 것이 우리 인생의 모습이다. 이것은 부자나 가난한자가 다 같다.

가진 사람이 더 많이 가지려 하고, 더 많은 쾌락을 즐기려 하고 더 많이 염려한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구체적으로 음식 과 목숨, 몸 과 의복을 비교하셨다.

몸을 위해서 의복이 있고, 목숨을 위해서 음식이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그런데 실제 생활에서 나타나는 문제는,

음식을 위해서 목숨이 있고 의복을 입기 위해서 몸이 있는 것 같이 살아간다는 것이다.

일도 마찬가지다. 몸이 있고 일이 있는 것이지, 일이 있고 몸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염려가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본문 27절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나?” 했다.

원문은, “Who of you by worrying can add a single hour to his life?" 이다.

 

생명이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고 성경은 가르친다.

염려와 근심에 빠지게 되면, 나의기분이 나빠질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기분도 상하게 한다.

일이 잘 안된다. 정신이 몽롱해진다. 건강을 잃어버리기가 십상이다.

무엇하나 제대로 되는 일이 없다.

 

하나님은 자기가 만드신 만물을 사랑하셔서,

공중에 날아다니는 작은 새 한마리도 관심을 가지고 먹이시고 돌보시는 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만물의 영장인 인간을 먹이시지 않겠는가?

들에 피는 백합화도 그렇게 아름답게 입히시고 기르시는데,

하나님의 자녀를 돌보시지 않으시고, 풍성한 삶으로 인도하시지 않으시겠는가?

 

깊히 생각해 보면 우리의 걱정과 염려는 믿음이 없는 데서 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 지금 나에게 말씀하신다. 너를 누가 만들었느냐? 너를 지금까지 지켜주신 분이 누구냐?

너를 죄에서 구원해주신 분이 누구냐?

너의 모든 것을 채워주시고 책임져 주시고, 생명까지 붙들어 주실 능력이 가지신분이 누구냐?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를 보고 생각해 보라는 말씀이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날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는 곧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상태를 말한다.

그런 곳이 곧 하나님의 나라이고 그것이 이루어지고 나면,

모든 다른 것들은 덤으로 따라오게 되어 있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하루 하루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감사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옹달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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