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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방 2/마가복음

기다리는 사람

by ongdalsem 2021. 4. 12.

"막15-42-47"

 

어떤 마을에 두 사람이 살고 있었다.

하루는 이 두 사람이 함께 점쟁이를 찾아갔다.

그래서 앞으로 자기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알아보기 위해

점괘를 봐 달라고 부탁을 했다.

한참 뜸을 들이던 점쟁이는두 사람 중 한 사람에게 당신은 놀고먹을 팔자요!하고 말했다.

그 사람은 기분이 너무 좋아서 복채를 두둑이 주고 돌아갔다.

 

그 사람은 그날부터 하던 일 다 팽개치고, 무위도식(無爲徒食)으로 놀기만을 일삼았다.

누가 뭐라 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기는 놀고먹을 팔자로 태어난 것을 굳게 믿었기 때문이었다.

 

같이 점을 보러 갔던 다른 한 사람은,

점을 보고 나서 매우 의기 소침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 점쟁이가 말하기를, ‘당신은 굶어죽을 팔자요!했기 때문이었다.

방안에 들어 누어 생각해 보니 기가 막혔다.

, 그 사람은 아무 일 하지 않고 놀고도 먹고 살 수 있는데나는 뼈 빠지게 일을 해도 굶어 죽어야 한단 말인가?’

 

며칠을 그 생각에 빠져있던 그는 누웠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마음을 다시 바로 잡았다. 그리고 마음속에 다짐을 했다.

어디 한 번 내가 열심히 살아보자!’.

다부지게 마음을 먹고 무슨 일이나 닥치는 대로 열심히 일했다.

조금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놀고먹을 팔자라고 놀기만을 즐기던 사람은 모두 망해 죽게 되었고,

굶어 죽을 팔자라던 사람은,

이를 악물고 열심히 일한 결과 한끼도 굶지 않고 그 때까지 잘 살았다.

한 사람은 놀면서 기다렸고, 다른 한 사람은 일하면서 기다렸다.

 

하나님의 약속은 적극적이요 능동적으로 기다리는 자의 것이다.

천국은 침노(侵擄)하는 자의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한다.(11:12)

천국은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는 자의 것이며,

주어진 삶을 하나님의 뜻 안에서 성실하게 살아가는 자의 것이다.

 

기독교인은 복음으로 사는 사람들이다. 복음이 무엇인가?

복음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하는 것은 올바른 신앙 생활을 위해 매우 중요하다.

복음의 정의를 분명히 할 때, 올바른 신앙 교육을 할 수 있게 되고올바른 선교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로 복음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자유로워지는 것을 복음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내가 평안해지고 잘 살게 되는 것이 복음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자기중심적 사고(思考)의 결과다.

 

성경 말씀에 따르면 복음은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는 역사적 과정이다.

이것이 하나님 중심의 복음다.

인간이 무엇을 해가지고, 인간의 노력으로 일시적으로 자유함을 얻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진정 복음일 수는 없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오직 하나님이 그의 선하신 뜻으로 말미암아,

인간을 자유케 하시는 것, 이것이 진정한 복음이다.

사람은 이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위탁(委託)된 자로 쓰여지는 것 뿐이다.

 

그러므로, 복음은 단순한 지식이나 철학이나, 어떤 추상적인 진리가 아니다.

바울은 복음에 대하여,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 이라고 말했.(고전 1:18) 

복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이요,

그 예수 그리스도가 창차 다시 오셔서 무너진 이 땅의 질서를 회복하실 것이라는 약속이다.

따라서, 복음은 이미 받았으나, 아직 완전히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사장의 나팔소리와 함께 다시 강림하실 그 때에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을 증거 하는 것이 전도요 선교다

이것을 바로 가르치는 것이 기독교 교육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교사라 할지라도, 이것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으면그는 복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섬기는 교역자나, 혹은 외지에서 선교하는 선교사에게 있어서,

그가 어떤 복음관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복음 안에 산다는 것은 이미 얻은 구원으로 자유함을 누리면서, 장차 온전하게 될 구원을 바라보는 삶이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과그 약속의 때를 향한 기디림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의 삶은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삶이요, 이것이 바로 복음 안에서 사는 것이다.

약속을 믿는 자만이 기다릴 수 있다기다린다고 하는 것, 그 자체에 이미 믿음이 들어있는 것이다.

믿음이 없이는 기다릴 수 없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8:7)는 말씀과 같이,

지금은 비록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 사람을 하나님이 반드시 창대케 하시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인내하며,

오늘의 삶을 충실하게 살아 가는 것, 그것이 복음 안에서 사는 것이며,

그렇게 살 수 있도록 하는 능력의 원천이 바로 복음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큰 은혜와 소망의 약속을 주셨다.

죽어야 하는 인간에게 살길을 예비해 두셨고,

그리로 오는 자는 누구든지 영생을 주시기로 약속 하셨다.

예수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이 하나님의 약속을 증거 하시고, 그 보증으로 십자가를 지셨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 그를 따르던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제자들과,

그에게 소망을 두고 있던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소망이 절망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허망할 데가 없었을 것이다.

이제는 그 동안에 가졌던 소망을 한갖 헛된 꿈이었던 것으로 치부하고,

옛날로 돌아가서 실망과 좌절 가운데 살아가야 하는 안타까움이,

제자들에게 있었을 것이.

 

믿음으로 살아 보려고 애써 왔는데 희망이 보이지 않는가?

실망과 좌절 가운데 옛날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일어는가?

실의에 빠져있는 제자들을 향해서 예수께서는 약속의 말씀을 주셨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28:20)

육신의 모습은 떠나 가셨지만, 그 주님은 성령으로 다시 오셔서,

지금도 믿는 자들과 영원토록 함께 계시는 것이다.

이것을 분명히 믿을 때 날마다 새 힘을 얻게 될 것이다.

 

당시 로마 법에 의하면,

십자가형을 받고 죽은 죄수의 시신은 새나 들짐승들에게 먹히도록 그냥 십자가 위에 놓아두는 것이 상례였으나,

죄수의 친척들이 매장 허가를 청구하면 선심을 써서 허가를 내어 주기도 했다.

그러나 반역죄로 처형된 죄수의 경우 원칙적으로 매장 허가가 나오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경우 반역죄의 죄목으로 돌아가셨음에도 불구하고 매장 허가가 나왔다는 것은,

매장 허가를 신청한 자가 친척이 아닌 사람이었는데도 허가가 나왔다는 것은,

전적으로 상례에 벗어난 특이한 일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물론 거기에는 하나님의 섭리하심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43)

그는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에게서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반역죄를 범한 것으로 인정되는 예수의 시신 인도를 요청하는 것은,

자신이 예수 및 그 추종자들과 한 무리임을 인정하는 것이었기에,

'존귀한 공회원'의 신분과 명예를 지닌 자로서 매우 힘들고 대담한 결정이었을 것이다.

 

그는 담대했다.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은 범사에 담대해진다.

이전에는 예수님의 제자인 사실을 숨겼던 요셉(참조, 19:38),

이제는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옳은 일,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깨달은 것이다.

 

잘못하면 예수님과 같은 죄목으로 죽음을 면치 못할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주는 의미를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다른 제자들은 후환이 두려워 고향으로 돌아가 은신처를 찾았으나

죽음을 통해 영광을 보는 자에게는 죽음을 초월한 담대한 행동이 있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구했다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산다.

아리마대 요셉에게 있어 예수님의 죽음은 바로 '나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했기에 자신의 소유를 들여 수의와 매장지를 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 누구도 하려 하지 않는 일을 정성을 다해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닌데, 예수님의 가족이 없는 것도 아닌데, 준비된 무덤조차도 없었는데,

요셉은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대의 정성과 물질로 예수님의 시신을 장사한 것이다.

 

그는 소망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은 끝까지 기다리며 실망하지 않는다.

본문 말씀에 보면 아리마대 요셉에 대하여,

'존귀한 공회원이요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장례를 치룰 수 있는 그의 담대하고도 굳은 믿음을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하늘나라를 기대하며 사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할 수 있으며(참조, 6:33, 34),

땅엣 것을 생각지 않고 위엣 것을 찾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참조, 3:1, 2)

오늘의 죽음 저 너머에 있는 내일의 영광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자,

그는 비록 어둠 속에 처해있다 할지라도 밝은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는 사람이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앞에 놓인 환경의 장애를 이기고,

담대함으로 실망치 말고그 날을 기다리며 오늘의 일에 성실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참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옹달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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