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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방 2/마가복음

억지로라도 하는 것이 안 하는 것보다 낫다

by ongdalsem 2021. 3. 13.

"마가복음 15장 21-32절"

 

  십자가 고난은 벌거벗긴 수치를 당하는 고통이다. 십자가에 손과 발에 못이 박히는 고통을 당해야 한다. 십자가의 고통은 자기 체중에 의하여 못 박힌 손과 발이 찢어지는 고통을 당해야 한다. 십자가의 고통은 물과 피를 다 흘리는 고통이며, 뜨거운 햇빛아래 놓여 있기 때문에 심한 목마름의 고통을 당해야 한다. 낮에는 뜨거운 태양 아래서 고통을 당해야 하고, 밤에는 추위에 고통을 당해야 하는 것이 십자가의 고통이다. 이 무서운 공포의 십자가를 예수님께서 나를 대신하여 지셨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산에 오르실 때, 잠시 예수님을 대신하여 십자가를 어깨에 메고 간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이 바로 구레네 사람 시몬이다. 그는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오게 되였고, 예수님께서 처형당하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구경하다가, 군병들에 의하여 억지로 예수께서 지셨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골고다 산에 오르게 된 것이다. 생각해 볼 것이 있다.

 

  예수님을 3년간 따르던 제자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위하여 생명을 바칠 것이라고 결의 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막상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에는, 아무도 예수님과 함께 죽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예수께서 “내가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고 죽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고난을 받을 때 너희들은 다 나를 버릴 것이다”(마 26:31)라고 말씀 하셨을 때, 베드로는 “다 주를 버릴 찌라도 나는 절대로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내 목슴을 주님을 위하여 버리겠나이다”(마 26:33,36) 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베드로가 자신있게 말한 것 처럼,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골고다 산에까지 올랐다면, 그는 과연 수제자다웠다고 칭찬을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의 고난의 자리에 얼굴도 보이지 않고 숨어 버렸다.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던 요한은 예수님의 고난의 자리에 와 있기는 했다.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서 눈물을 흘리기는 했지만, 예수님께서 지시고 가는 무거운 십자가를 내가 대신 지고 가겠다고 용기있게 나서지 못했다. 요한과 야고보는 예수께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시면, 하나는 좌편에 하나는 우편에 앉게 해달라고 부탁한 일이 있는데,(막 10:37) 정작 예수께서 고난을 달할 때는 좌우편에 있기를 거부한 것이다.

 

  또한 자기가 죽었을 때 예수님께서 다시 살려준 나사로도, “지금 내가 사는 것은 주님의 은혜이며, 나는 이미 죽은 사람인데 주님께서 살려 주셔서 지금 살고 있습니다. 지금 나의 삶은 덤으로 사는 것이니 지금 주님과 함께 죽겠습니다.” 라고 말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져 주었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가 되겠는가? 그런데 나사로도 그러지를 못했다. 3년간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또한 예수님의 손길로 병고침을 받은 많은 사람들, 그리고 예수님으로 부터 말씀을 들으려고 따랐던 수많은 무리들, 기적과 이적을 체험한 많은 사람들 모두가 예수님을 도와주지 못했다. 예수님의 고난에 한 사람도 동참하지 못하고, 멀리 서서 구경을 하고 있던가 아니면 도망가서 숨어있었다. 물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들이 다 나를 버리고 흩어지지라.” 에언을 하셨지만, 그 고통스러운 고난의 자리에 한사람도 함께 하여 주지 않았다는 것은, 비애를 느끼게 해주는 장면이다. 한 사람이라도 “내가 주님과 함께 죽겠습니다.” 라고 나섰다면, 예수님께서는 얼마나 기쁘시고 용기가 나고 힘이 솟았을까? 

 

  삼년간 정성들여서 가르치신 말씀이 수포로 돌아갔단 말인가? 예수님의 가르침이 헛수고였단 말인가? 예수님께서 인덕(人德)이 없어서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으신 것인가? 제자들의 믿음이 아직까지 죽음의 고난에 동참할 만큼 자라지를 못했던 까닭인가?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누구도 대신 질 수 없는 십자가다. 찬송가 가사 중에 '예수님의 십자가 이제는 나도 지고...'하는 가사가 있는데,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누가 감히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를 대신 질 수 있단 말인가?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이나 제대로 감당하고 살고 있다면 그나마 다행일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자리는 참으로 비참한 자리였다. 누구도 함께 해 주지 못하는 슬픈 자리였다. 만약 내가 예수님의 제자였고 그 자리에 있었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나도 베드로나 다른 제자들처럼 숨어서 구경만 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구레네 사람 시몬이 잠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생명을 소유한 하나님의 자녀라고 자부하는 오늘의 그리스도인들도, 예수님의 도우심이 필요할 때에는 매일 예수님을 찾고 의지하며 살다가도, 예수님께서 나를 필요로 할 때에는 외면하고 떠나는, 이기주의적인 신앙인들은 아닌가?  

 

  성숙한 신앙은 예수님께서 필요로 하시고 원하실 때 옆에 있는 신앙이다. 성숙한 신앙은 예수님께서 원하실 때 내 생명까지도 드릴 수 있는 신앙이다. 마땅히 이렇게 기도해야 할 것이다. “주여! 이 생명이 필요하시면 이 생명을 받으십시요”, “주여 이 교회를 위하여 내 생명을 바칩니다. 나의 생명을 쓰십시오”, “고난의 자리에서 저들처럼 외면하고 배신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해 주십시오”.

 

  성경은 시몬이 억지로 십자가를 졌다고 기록하고 있다.(막 15:21) 시몬은 자원하여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향한 것이 아니라, 원치는 않았지만 할 수 없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갔다. 억지로 한다는 것은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다. 억지로 하는 일에는 기쁨이 없다. 억지로 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지겹고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우리 인생은 억지로라도 해야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이 있는가? 학교에 가서 공부하는 아이들의 대부분이 억지로 하는 것이다. 직장생활도 억지로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가? 신앙생활도 그렇지 않은가?

 

  시몬이 십자가를 지게 된 것이 하나님의 큰 은혜라는 것을 깨닫고,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바로 깨달았다면, 시몬은 억지로가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십자가를 졌을 것이다. 그가 “이 십자가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중보의 십자가인데 내가 대신 지고 올라간다. 이 십자가는 나를 죄를 용서하시기 위한 희생의 십자가이며, 나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는 구원의 십자가다”라는 비밀을 알았다면 그는 감격하고 기쁨으로 십자가를 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비밀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 억지로 끌려가서 십자가를 진 것이다. 만약 내가 억지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구레네 사람 시몬처럼 하나님의 은혜의 신비한 비밀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은 자원하는 마음으로 기쁨을 가지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자원하는 마음으로 못한다면 억지로라도 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들이 매일 세끼 식사를 하는데 일년 열 두 달 매 끼니마다 맛이 있어서만 먹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입맛을 잃고 밥맛이 쓰게 느껴 질 때도 있다. 그래도 밥을 먹어야 건강이 유지되는 것이다. 밥맛을 잃었다고 며칠씩 굶고 있으면 기운을 차리지 못하고 건강을 잃게 되는 것이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교회에 나가기가 싫다고 몇 번 쉬어보면 더 못 나가게 된다. 기도하기 힘들다고 기도를 쉬면 아에 기도를 잃어버리게 된다. 그러므로 억지로라도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하게 되면, 기도하는 가운데 은혜를 받고 능력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일년 365일 52주 목사가 설교할 때마다 은혜를 끼치고 은혜를 받기란 어려운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은혜가 돼도 나에게는 은헤가 안될 때도 있다. 또 설교를 들어도 다 기억하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예배 마치고 집에 가면 웃겼던 예화만 남고 들은 말씀은 금방 잊어버리는 것이 설교다. 그래도 열심히 듣다가 보면 자신도 모르게 신앙은 점점 자라나게 되는 것이다. 마치 콩나물 시루에 열심히 물을 주다보면, 물은 다 밑으로 흘러내려 버려도 콩나물은 모르는 사이에 쑥쑥 자라는 것과 같은 것이다.

 

  구레네 시몬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모르기 때문에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산에 올라갔다. 그러나 그 후에 시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진리의 비밀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에 감격하며,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며 사는 초대교회의 훌륭한 지도자가 되었다. 억지로 진 십자가가 그에게 말할 수 없는 은혜로 임한 것이다. 그의 아들들인 알렉산더와 루포는 바울을 도와서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었고, 시몬 역시 안디옥 교회에서 바울과 함게 복음을 전하는데 큰 몫을 담당했다. 그리고 시몬의 부인 역시 믿음이 좋은 여인으로서 바울은 그를 가리켜서 “내 어머니”라고 말했다. 시몬은 복음을 전하면서,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진 것이 큰 간증이요 자랑거리였을 것이고, 그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쳤을 것이다.

 

  억지로 하는 것이 때로는 큰 유익이 되는 수도 있다. 억지로 십자가를 대신 져도 복을 받았는데, 자원함으로 십자가를 지면 얼마나 더 복이 되겠는가? 자원하여 기쁜 마음으로 일하는 것이 바람직한 신앙이다. 그것이 성숙한 신앙이다. 억지로 하는 일이 자원하여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하는 것보다는 좋을 리 없다. 억지로 하는 것은 힘이 들고 지루하고 때로는 지겹기까지 할 것이며, 일에 능률도 없을 것이다. 억지로 주일 성수하고, 억지로 봉사하고, 억지로 기도하고, 억지로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억지로 십자가를 지는 신앙은 성숙한 신앙이 아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이다. 억지로 하는 신앙생활에는 뜨거움과 열정이 없다. 억지로 드리는 예배는 감동이 없다. 억지로 하는 것은 아직 잘 모르기 때문이며. 억지로 하는 것은 성령의 감동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원하여 기쁜 마음으로 “내가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겠습니다.” 라고 할만큼의 믿음에 도달하지 못하였다면 억지로라도 해야 한다.

 

  억지로라도 하다가 보면 어느 단계에 도달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 스스로 자원하여 할 수 있는 능력과 지혜가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신앙에는 인내가 필요한 것이며 인내를 가지고 열심히 따라가게 되면 성숙한 신앙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억지로라도 순종하고 억지로라도 내게 맡겨진 짐을 져야 한다. 그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더 크게 주어질 것이다. 그 은혜로 끝내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게 될 것이다.

 

(옹달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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