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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방 2/요한복음

왜 넘겨주었는가?

by ongdalsem 2021. 3. 20.

"요한복음 1910-16절"

 

유월절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예수께서 나귀 새끼를 얻어 타시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셨다,

그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주위를 둘러싸고 따르면서 외쳤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21:9)

 

그 때 만약 예수께서 하나님의 뜻을 생각지 아니하고,

군중의 인기와 환호소리에만 관심을 두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군중의 세력을 등에 없고 한바탕 소동이 났을 것이다.

예수를 따르는 많은 군중들이 원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 아니었겠는가?

 

그 사람들중 대부분은 자기들 나름대로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았을 것이다.

예수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 장차 유대 나라를 구할 자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가 행하는 많은 이적과 기사를 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따르며 큰 소리로 외친 것이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이제는 당신이 나서서 이 나라를 구해야 될 것이라고 외친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게 내어준 것이다.

예수가 이 땅에서 없어저야 된다고 외친 것이다.

군중을 소란하게 하는 위험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누구인가?

언제나 어느 때나 사건을 대하는 시각은 서로 다를 수가 있다.

 

수년동안 막강한 권좌에 앉아있던 사람이 하루 아침에 죄인의 자리로 떨어진다.

검찰의 수사를 받던 도중에 자살 소동을 벌인다. 무슨 까닭인가?

한쪽에서는 죄인이라는 것이요, 다른 한 쪽에서는 죄인이 아니라는, 서로 다른 견해 때문이다.

사람의 생각은 이렇게 서로 다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진실은 언젠가는 들어난다는 것이다.

 

저들은 각자 자기들의 입장에서 예수를 정죄하고,

십자가에 처형되도록 내어주고, 십자자가에 못박았지만,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셨으며, 그는 우리의 참 구원자시다.

그들 자신이 못박은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들의 후손이 사죄의 은총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근시안적인 판단으로 자기의 유익만 구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예수를 십자가에 넘겨주고 못박은 사람들은,

대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과 그들을 따르는 자들이었다.

저들은 당시 사회의 지배계급에 속해있는 사람들이었다.

자기들의 정치적인 지위나 사회적인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하는 사람들이다.

오늘도 우리의 주위에서는 이와 같은 일들이 얼마나 많이 벌어지고 있는가?

 

저들은 저들대로 할 말이 있었다.

나사렛마을 목수의 아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사칭하고 사회를 어지럽힌다는 것이다. 전통을 무너뜨린다는 것이다.

성전에서 물건을 사고 파는 것, 모두 성도들의 편의를 위해서 하는 것인데,

그것이 무엇이 잘못된 것이라고 상을 둘러엎으며 난동을 부리는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가 못마땅했던 것이다그들은 독선과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다.

 

가룟인 유다는 어떤가? 그는 오로지 은 삼십개를 얻기 위해서 예수를 팔았다.

아마도 은 삼십개는 그에게 큰 유익이 되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에게 무슨 유익을 주었는가? 그는 그 돈 한푼도 써보지 못하고 죽었다.

 

빌라도도 그랬다. 재판장의 위치에 앉아있으면서도 소신을 펴지 못했다.

예수에게서 아무런 죄도 찾지 못했으면서도,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넘겨주었다.(16)

판사들이 뇌물을 받고, 검사가 뇌물을 받고, 변호사가 뇌물을 받으면,

그들의 자기 자리 지키기에만 급급하면 그 재판의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가?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공의를 굽게 하는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일들이 어찌 하나님의 공의 앞에 들어나지 않겠는가?

오늘도 우리 주변에서는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

모두가 빌라도와 같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전혀 다른 삶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다. 그는 얼마든지 고난을 면할 수 있었다.

하늘의 천사를 불러서 저들을 혼내줄 수 있었다.(26:53).

그러나 예수께서는 오히려 잠잠하셨다. 자신의 평안함이 문제가 아니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중요했고, 죄에 빠진 인간을 구원하는 일이 중요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말씀하신 것이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26:30).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이 있음으로 우리에게 구원의 길이 주어진 것이다.

 

모세에게도 이 예수의 마음이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패역하여 우상을 섬김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샀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백성을 진멸하시겠다고 했다그 때에 모세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기도했다.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32:32).

 

페르시아의 아하수에로 왕 때에 에스더라는 왕비가 있었는데 그는 유대인이었다.

왕의 신하 중에 하만이라는 장군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유대인을 매우 싫어했다.

그래서 왕을 부추겨서 국내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죽여도 좋다는 왕명을 얻어냈다.

이 일을 알게 된 에스더는 죽기를 각오하고 왕에게 나아가서 자기 민족을 구했다.

그 때에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왕에게 나아갔던 것이다.(에스더 4:16).

자기 민족을 구하는 일이라면 자기 한 목숨쯤 아깝지 않게 여긴 것이다.

 

바울도 그랬다.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고서 사람이 완전히 변했다.

이 세상 아무 피조물도,

바울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음을 알았다.

이 것을 자기 동족에게 전하기 위해서 어떠한 고난도 마다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자기 동족이 구원받는 일이라면,

차라리 자기가 저주를 받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라고 말했다.(9:3)

 

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이나, 빌라도는,

각기 자기들의 유익을 위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도록 넘겨주었지만,

예수께서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 고난의 길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가신 것이다.

예수께서 채찍에 맞으시고, 창에 찔리시고, 십자가를 지심으로 나의 죄가 사해졌고,

사망으로 달려가던 나의 삶이 영원한 생명을 향해 나아오게 된 것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의 것임이라”(5:10)

 

(옹달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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