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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방 1/민수기

마지막 소원

by ongdalsem 2020. 10. 13.

민수기 27장 12-23절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인 가나안에 이르기까지 그들을 앞장섰던 모세는 참으로 위대한 지도자였다. 그는, 애굽 왕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입양되어서, 훌륭한 교육을 받았고, 장래에 애굽 왕 바로의 후계자로 물망에 올랐던 자였다. 별 이변이 없는 한, 차기의 애굽 왕은 모세가 될 것으로 모두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자기가 애굽 왕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 아니라, 온갖 학대를 받으며, 노예 생활을 하고 있는 히브리인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이 일이 그의 일생의 좌표를 바꾸어 놓고 말았다. 그는 온갖 설득에도 굴하지 않고, 히브리 사람, 아므람과 요게벳의 아들로 돌아갔다. 참으로 힘든 결단이요, 위대한 결단이었다. 확실히 보장되어 있는 부귀와 영화를 버리고, 고생길로, 학대받는 길로 들어섰다.

 

  성경은 이 일을 두고, 모세가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 1125-26)고 기록하고 있다. 눈앞의 것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원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바라보는 비전이 있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원대한 비전을 가지고 멀리 바라보는 모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시고, 그와 함께 하셨다.

 

  목표를 바로 세우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목표를 잘못 세우면 엉뚱한 길을 가게 된다. 목표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그 지혜를 하나님께 구해야 한다.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고 성경은 말씀한다. 그리하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약 5:1) 다윗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된 솔로몬은, 왕이 된 다음 즉시 하나님께 나아가서 지혜를 구했다. 부귀와 영화로 나라가 다스려 지는 것이 아님을 깨달은 것이다. ‘주를 경외함이 곧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다.(욥 28:28). 진정 지혜롭기를 원하는가? 하나님께로 더 열심히 나아가야 한다. 반드시 지혜를 주실 것이다. 명철하게 되기를 원하는가? 하나님께로 날마다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한다. 반드시 명철을 주실 것이다.

 

  아무리 부귀 공명을 누려도 지혜가 막히면 헛것이다. 한때 부족함이 없었던 사람들이, 권세의 정상(頂上)을 누리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범죄자로 바뀌는 모습을 우리는 너무도 똑똑히 보고 있다. 하나님이 그 지혜를 막으신 때문이다. 지혜가 있을 때에 구할 것을 바로 구하게 된다. 솔로몬이 다른 것 다 그만두고 지혜를 달라고 구했던 것 그 자체가 하나님이 주신 지혜였던 것이다. 무엇을 구할까 하고 곰곰이 생각하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지혜를 구하라’ 하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하나님이 그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기쁨을 주신다’( 잠2:6)고 성경은 말씀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랑 받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 세상의 눈으로 볼 때, 모세는 그저, 바로의 딸과 결혼하여 애굽의 왕이 되는 것이 성공하는 길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버렸다. 바로 왕이 볼 때, 너무도 철없는 짓이다. 기가 막힌다. 그러나, 자기 동족에 대한 뜨거운 마음이 있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있음으로, 모세는 이것들을 버린 것이다. 바울도 그랬다. 그가 하나님을 만난 후 그의 자랑이 달라졌다. 그의 소망이 바뀌었다. 그는 자랑할 것도 많았다. 가문이 좋았다. 혈통이 좋았다. 우수한 두뇌를 지녔다. 학벌도 기가 막히게 좋다. 당대에 유명한 가마리엘의 문하생(門下生)이다. 태어난 로마 시민(Born Citizen)이다. 의롭게 살려고 애쓴 것은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이다.

 

  그런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그런 것들이 모두 부질없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말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힌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소망이 바뀐 것이다. 지금까지 자랑으로 여기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빌 3:8), 동족(同族)의 구원을 위해서 남은 여생을 바쳤다. 모세가 구한 것도 자기의 영달이 아니라 민족의 해방이었다. 지금까지 그가 가지고 있던 소망이 바뀐 것이다. 소망을 바르게 가져야 한다. 하나님 앞에 바른 소망을 가질 때, 하나님이 그를 일으키신다.

 

  성경 본문 말씀 가운데는 참으로 안타까운 말씀이 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아바림 산(山)에 올라가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준 땅을 바라 보라(12절), 본 후에는 네 형 아론같이 너도 조상에게로 돌아갈 것이다(13절)'. 그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가?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생활 40년동안, 얼마나 많은 어려움이 있었는가? 그것들을 모두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이기고 여기까지 왔는데, 이것이 무슨 청천 벽력 같은 말인가? 그렇게도 가고 싶었고, 꿈속에서도 잊을 수 없었던 가나안 땅을 멀리 바라보기만 하고 죽으라는 말씀이다. 어떻게 해서 얻은 것인데 모두 놓고 떠나라는 말씀인가? 원통한 마음이 생길 수 있다. 한이 맺힐 수도 있다. 그런데 모세는 아무런 불평이 없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처음부터 모세가 택한 것은 자신의 영화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이제는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자기 민족의 앞날에 하나님의 보장이 있음을 분명히 본 것이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 위해서 시내산 꼭대기에 올라갔다. 백성이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지를 않는다. 초조해진 백성들은 아론을 부추겨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것이 자기들을 인도할 신(神)이라고 그 앞에서 먹고 마시며, 춤추고 광란(狂亂)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가지고 내려오다가 이 광경을 본 모세는 너무도 기가 막혔다. '세상에 이럴 수가있는가?'하고는 너무도 화가 나서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돌 판을 던져 우상을 깨뜰여 버렸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보통일이 아니다. 닥쳐올 하나님의 진노가 불을 보듯이 환하게 보였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간절히 기도했다.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벼려 주옵소서”(출 32:32). 모세의 가슴속에는 자신의 영달보다 민족의 앞날을 염려하는 마음이 더 크게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울에게도 근심이 있었다. 큰 고통이 있었다. 그것은 동족이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이고 구원받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말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롬 9:3). 참으로 놀라운 결단이다. 저들을 위해서 내가 죽어야 한다면 기꺼이 죽겠다는 것이다. 모세도, 바울도, 그들의 진정한 소망은 세상이 생각하는 것과 달랐다. 어떤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가? 예수께서 세상에 계시는 동안 많은 이적과 기사를 행하시고, 그를 따르는 많은 무리들에게 천국 복음을 주실 때에 군중들은 예수로 하여금 유대인의 왕이 되기를 소망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천국이 이 세상의 권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가르치시고, 십자가의 길로 가셨다. 예수님의 소망은 자신이 유대인의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백성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는 것이었다. 십자가 형틀에서 살을 찢기시고, 피를 흘리시면서도, 그가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신 것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눅 23:34)하는 말씀이었다. 모세도, 바울도, 예수께서도, 자기를 위해서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자기 백성을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내어 주었을 뿐이다. 그들의 소원은 한결같이, ‘나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저들에게’ 있었다.

 

  가나안 땅을 멀리서 보기만 하고, 들어갈 수는 없고, 여기서 죽어야 한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모세는 이제 그의 마지막 소원을 하나님께 말했다. 자기 대신 새 지도자를 세워 달라고 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목자 없는 양같이 되지 않게 해 달라고 말했다.(민 27:16-17) 비록 한 두 번 화를 낸 것 때문에 영광을 눈앞에 두고 세상을 떠난다 할지라도, 조금도 원망이 없다. ‘저들’만 잘되면 그만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겸허히 받아들였다. 세상 사람들은 할 수만 있으면 자기를 나타내려 한다. 할 수만 있으면 자기가 영광을 받으려 한다.

 

  스위스에 페스탈로치(Pestalozzi)라고 하는 위대한 교육자가 있었다. 그는 어린아이들을 무척 사랑했다. 그가 죽었을 때에, 평소에 그를 존경하던 사람들이 그의 동상(銅像)을 만들기로 하고, 유명한 조각가로 하여금 페스탈로치의 동상을 만들게 했다. 마침내 심혈을 기울인 동상은 완성이 되었고, 제막식을 하게 되었다. 이윽고, 동상을 덮고 있던 천이 벗겨졌다. 그것은 아주 훌륭한 작품이었다. 페스탈로치가 무릎을 꿇고 앉아서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한 어린아이를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페스탈로치의 겸손한 모습과 아이를 사랑하는 그 모습에 감탄했다. 그런데 처음에 동상 제작을 맡겼던 사람들은 동상이 잘못 되었다고 다시 제작해 줄 것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아주 오랬동안 공들여 만든 작품이지만 거기에는 페스탈로치의 참 모습이 담겨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결국 동상은 다시 만들어졌다. 새로 만든 동상의 모습은 이전 것과는 아주 다른 모습이었다. 무릎을 꿇은 어린아이가 페스탈로치와 나란히 앉아서, 페스탈로치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높은 하늘을 함께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 때서야 모두들 페스탈로치의 정신이 무엇인가를 알았다. 페스탈로치는 어린아이들로 하여금 그들의 눈이 그들을 가르치는 자기를 보지않고, 아직 도달하지 못한 더 높은 목표와, 하나님께로 향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훌륭한 인도자는,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며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는 사람이다.

 

  모세는, 지금까지의 모든 것이 자기의 공이 아닌 것을 알았다. 자기의 때는 지나갔고, 하나님이 이제는 다른 사람을 쓰시려 하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하나님께 청했다. ‘한 사람을 백성 위에 세워서, 하나님의 백성이 목자 없는 양무리같이 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은 한발 앞서 가셨다. 여호수아를 예비해 두셨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고, 네 존귀를 그에게 돌리라”.(민 27:18-20) 어느 단체나 회장은 있다. 그러나, 일단 그 자리 그만 두면 평회원으로 돌아갈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자기가 받았던 존경, 가지고 있던 권한, 모두 속히 물려주어 버려야 하는 것이다.

 

  세상의 지도자는 권력 누수 현상을 걱정한다. 그래서 속히 후계자를 결정하지 않으려 한다. 퇴임한 뒤까지 염려하며 그것까지 자기가 준비하려 한다. 모두 부질없는 일이다. 나는 사라지더라도 하나님의 일은 계속될 것이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때에 나를 쓰셨던 것처럼, 또 다른 하나님의 때에 다른 사람을 쓰실 것이다. 내가 가지 못하더라도, 다른 이는 가게 될 것이요, 내가 누리지 못해도, 내 형제가 누릴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나는 그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도구로 쓰여지는 것 뿐이다.  마지막 소원이 아름다워야 한다

 

(1996년 9월 1일 - 옹달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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