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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방 1/민수기

행동이 따라야 한다.

by ongdalsem 2020. 8. 21.

민수기 235-12

 

  사람은 대개 유명해 지기를 원한다. 역사에 훌륭한 이름을 남기기를 원한다. 호사유피(虎死留皮)요 인사유명(人死留名)이라고,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옛 말도 있다. 사람은 모름지기 가치 있는 이름을 남겨야 한다는 말씀이다. 이름을 남기기는 남겨야 하겠는데 남길데가 없으니까, 등산 길에 길 옆에 있는 바위에다가 자기 이름을 새겨놓고 가는 어리석은 사람들도 더러 있다. 코메디언 김미화씨가 어느 자리에서 말하기를, 자기가 죽으면 묘비에, "웃기고 자빠졌네!" 라고 써 달라고 했다.

 

  사람이 한 평생을 살아가는데 아름다운 소망을 가지고 사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래야 그 소망이 있는 고로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하여 열심히 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소망을 가지고 살고 있는가?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 어떻게 살고 있는가? 선지자 발람은 아름다운 소망을 가졌다. 나는 의인의 죽음같이 죽기를 원하며, 나의 종말이 그와 같기를 바라도다”(23:10) 했다. 발람이 어찌해서 이런 소망을 가지게 되었을까? 그리고 발람은 그 소망을 위해서 어떻게 살았고,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를 살펴보는 것은 매우 유익한 일이다

 

  인간에게는 두 가지의 욕망이 있다. 하나는 육적인 것이요, 하나는 영적인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이 두가지를 동시에 이룰 수 없다고 말씀한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를 거스린다’(5:17)고 말씀한다. 크리스챤은 성령에 이끌리어 사는 사람들이다. 성령의 소욕을 따라서 살고자 히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성령의 열매를 맺고 사는 사람들이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이다. 성령의 열매는 오래 참는 것이요, 자비함이요, 양선이다. 성령의 열매는 충성되고, 온유하고, 절제하는 모습이다.

 

  이 모습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참 크리스챤이다. 이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이 모든 성도의 소망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 소망이 바로 이루어진다고 하면 이 세상은 한층 더 살기 좋은 세상이 될 것이다. 성령의 열매는 성령의 원하시는 것인데, 어떻게 해야 이 열매를 풍성히 맺을 수 있을까?

 

  감자 요리를 맛있게 먹기 위해서는 감자가 있어야 한다. 감자는 감자를 심어야 얻을 수 있다. 콩을 심어 놓고 감자를 얻을 수는 없다. 영농법이 발전되어서 감자를 심어 놓고도 도마도를 딸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아무리 영농 기술이 발전했다 하더라도, 도마도 뿌리에서 감자를 얻을 수 없고, 감자 줄기에서 도마도를 얻을 수는 없다고 하는 것이다. 감자는 감자 뿌리에 달린 것이고, 도마도는 도마도 줄기에 달린 것이다. 다만 감자 뿌리에 도마도 줄기를 접붙여서 된 것뿐이다.

 

  육체의 길로 가면서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는 없다. 열매가 그저 땅에서 솟아 나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서 그냥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씨앗이 심어지고 줄기가 자라야 열매를 거둘 수 있다. 심기만 한다고 좋은 열매를 얻을 수는 없다. 열심히 매고 가꾸어야 한다. 성령의 씨앗이 뿌려졌으면, 성령의 싹이 날 것이다. 이것을 잘 키워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훌륭한 인물이다. 얼굴이 잘 생겨서 그가 훌륭한 인물이 된 것이 아니다. 훌륭한 일을 했기 때문이다. 명불허전(名不虛傳)이라는 말이 있다. 아무 한일도 없는데 이름이 전해지는 경우는 없다는 말이다. 이름이 어떻게 전해지기를 원하는가?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데 어느 날 갑자기 유명해 지는 일은 없기 떄문이다.

 

  발람이 원한 것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의인의 죽음같이 죽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는 의인의 종말같이 되는 것이다. 발람이 왜 이것을 원했을까? 의인’(Righteousness)은 어떤 사람이며, 의인의 죽음은 어떤 모습이기에 그것을 원했는가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을 저주하고 복채를 받아 부를 누리려 하던 발람은 그것이 허사였음을 알았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백성인 것을 알았다. 그래서 말했다. “하나님이 저주하지 않으신 자를 내 어찌 저주하며, 여호와께서 꾸짖지 아니하신 자를 내 어찌 꾸짖을꼬?”(23:8).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이 의인이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사는 사람이 의인이다. 죄가 없음으로 의인이 된 것이 아니라, 죄없다 여기심으로 의인이 된 것이다. 삼람 중에 죄 없는 자가 있는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3:10)고 성경은 말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의롭다 여기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이 의롭다 하신 자들을 발람이 저주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의 죄를 도말해 주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다. 죄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의 보혈로 덮어 주신 것이다. 다시는 하나님 앞에 나타나지 않도록 가리워 주신 것이다. 그래서 죽어야 할 죄인을 죄와 사망에서 구해 주신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확신을 가지고 말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8:1-2). 아무것도 능히 성도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8:39).

 

  이것이 의인의 모습이다. 발람은 이스라엘 백성을 바라보면서 이것을 깨달았다. 도저히 그들을 저주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말했다. “야곱을 해할 사술이 없고, 이스라엘을 해할 복술이 없도다”(23).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한 아무것도 나를 해할 수 없다. 그래서 성도들은 노래할 수 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 받을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로다’(23:4). 오늘도 하나님은 여러분을 향해서 말씀하신다. ‘너희가 나와 함께 있기를 즐겨 하느냐? 그러면 염려하지 말라’. 이 음성을 들어야 한다. 이 믿음 가지고 모든 일에 담대하게 대처해야 한다. 하나님은 식언(食言)치 아니하시는 분이시다.(19)

 

  의인의 죽음은 어떤 죽음을 말하는가?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그것은 이미 정해진 것이다.(9:27) 무도 벗어날 수 없다. 다만 어떠한 죽음을 죽느냐 하는 것이 다를 뿐이다. 죽음에도 두 가지 다른 모습이 있다. 하나는 당연한 죽음이요, 다른 하나는 애석한 죽음이다. 가라지를 불사르는 것이나 알곡을 불사르는 것이나 불사르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가라지가 불살라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알곡이 불살라지는 것은 애석한 일이다. 언젠가 주어진 생을 마감할 때 세상으로부터 어떻게 여겨지기를 원하는가? 당연히 여김을 받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애석히 여김을 받기를 원하는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애석히 여김을 받을 수 있다고 하면 참으로 가치 있는 인생을 산 것이다. 가치 있는 인생을 살지도 않았는데 애석히 여김을 받을 수는 없는 일이다. 성도에게 있어서 죽음은 끝이 아니다. 새로운 삶의 시작일 뿐이다. 의인은 그 죽음에도 소망이 있다고 성경은 말씀한다.(14:32) 악인의 죽음은 당분간 기억되겠으나 얼마 가지 않아서 잊어버려지고 만다. 그러나 의인의 죽음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여호와께서 성도의 죽는 것을 귀히 보신다고 성경은 말씀한다.(116:15) 불신자들은 절망 가운데서 죽음을 맞게 될지라도, 성도들은, 하나님이 택하신 의인들은, 소망 가운데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발람은 또 자기의 종말이 의인과 같이 되기를 소원했다. 의인의 종말은 어떤 모습인가? 이 세상은 종말이 있다. 세상의 종말은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다. 그러나 성도들에게는 이 세상이 끝나면 다른 세계가 주어진다. 요한계시록에는 성도들이 맞이할 종말에 대해 기록된 말씀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된다는 것이다(21:7). 다시는 밤이 없는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세세토록 왕노릇 할 것이다(22:5). 오늘은 비록 고난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반드시 성도들을 고난에서 건지실 것이다.

 

  발람은 이스라엘의 장래를 내다봄으로, 지기도 이스라엘 백성처럼 복된 삶이 되기를 원했다. 종말도 그와 같기를 소원했다. 그러나 성경의 기록을 보면, 발람은 탐욕을 버리지 못하고, 꾀를 써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우상 앞에서 음행의 죄를 범하게 하였고, 결국은 자신도 이스라엘의 칼에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선한 소망을 가지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선한 소망을 위하여 힘쓰지 않는데 있다. 발람은 선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선한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 올바른 길을 가지 않았다. 성도들은 마땅히 발람처럼 선한 소망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발람의 가는 길을 가서는 안되는 것이다.

 

  Matthew Henry는 그의 민수기 주석에서, ‘의인의 죽음처럼 죽기를 원하는 사람은 많지만, 의인의 삶처럼 살려고 애쓰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말했다(There are many who desire to die the death of the righteous, but do not endeavor to live the life of the righteous). 의인의 종말을 맞이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성도들이 마땅히 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보다도 더 좋은 것은 의인의 삶을 사는 것이다. 의인의 삶을 살지 않고는 의인의 종말을 맞을 수 없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다 하시고, 값주고 사신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들이다. 이 긍지를 가지고 의인답게 살아야 한다. 그러면 풍성한 의의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탐욕으로는 하나님의 일을 이룰 수 없다.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한다. 선한 소망을 가지시고 즐거운 마음으로 그 길을 가야 할 것이다. 이기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될 것이다. 의인의 삶을 살다가, 의인의 종말을 맞이하기 바란다.

 

(옹달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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