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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방 1/민수기

눈 뜬 자가 하는 말(語)

by ongdalsem 2020. 8. 25.

민수기 241 - 9

 

  예수께서 어느 날 제자들과 함께 달마누다라 하는 지방으로 가셨다. 그런데 그만 제자들이, 먹을 떡을 가지고 가는 것을 잊어 버렸다. 다만 어떤 사람이 떡 한 개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제자들은 술렁대기 시작했다. 날은 저물고 사람은 많은데 먹을 것이 없으니 걱정이다. 그런 제자들의 모습을 보시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8:18).

 

  이미 예수께서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시고도 열두 바구니를 거두는 이적을 제자들에게 보이셨다.(눅 9:10-17) 그것이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며칠 전의 일이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먹을 양식 때문에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제자들은 몇 날 며칠이 아니라 3년씩 따라 다니면서 듣고 보고 하면서도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믿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의논하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8:17).

 

  또 한 번은, 예수께서 벳세다에 가셨다. 그 때에 사람들이 소경 한 사람을 데리고 예수께로 왔다. 그리고 예수께서 그를 고쳐 주시기를 바랐다. 예수께서는 소경을 데리고 조용한 곳으로 가셔서 침을 바르고 손을 대심으로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다. 그래서 그 소경은 사람들을 알아보게 되고, 만물을 밝히 보게 되었다.(요 9:5-7)

 

  볼 수 있다는 것은 귀한 것이다. 나이가 많아도 눈이 밝은 것은 복()이. 신령한 눈이 열리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는 것은 더 큰 축복이다. 예수님을 만나면 이 눈이 열린다. 사람을 바로 보게 된다. 만물을 밝히 볼 수 있게 된다. 밝히 본다는 말은 제대로 보고 멀리 본다는 말이다. 대충 대충 보거나 눈앞에 있는 것만을 보는 것이 아니다. 신령한 눈이 열리면 바로 보고 멀리 볼 수 있게 된다.

 

  멀리 보려면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한다. 높은 산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더 멀리, 더 넓게 볼 수가 있다. 그리고 어느 한 부분만이 아니라 거의 전체를 볼 수 있다. 주마간산(走馬看山)이라는 말이 있다. 말을 타고 달리면서 산() 구경을 한다는 말이다. 그래가지고야 무엇 하나 제대로 볼 수가 있겠는가?

 

  영어로 된 격언 중에, ‘Seeing is Believing’이라는 말이 있다. 보는 것이 믿는 것이라는 말이다. 우리 속담에는, ‘백문이 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고 말한다. 백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더 믿을 수 있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말은 믿음의 말이 아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11:1). 보이는 것만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오히려 보이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이 내게 함께 하심을 믿는 것, 그것이 믿음이다.

 

  눈앞의 것만 본 소련은 Alaska주를 쓸데없는 땅이라고 미국에 헐값으로 팔아 넘겼다. 그러나 믿음의 눈을 가진 미국은 소련이 버리는 땅을 7백만 불에 샀다. 석유를 비롯해서 엄청난 지하자원을 보유하고 있는 Alaska주는 미국의 보고(寶庫). 믿음의 눈이 찾아낸 보물이다. 먼 앞날을 믿음으로 보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선지자 발람은 브올산 꼭대기로 올라갔다. 거기서 이스라엘 백성이 진을 치고 있는 광야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말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 전능자의 이상(異像)을 보는 자, 엎드려서 눈을 뜬 자(24:4, 16)가 말한다". 성경에 보면 그때 발람에게는 하나님의 신이 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24:2).

 

  하나님의 신이 임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듣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신이 임하니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게 되었다. 하나님의 신이 임하니 눈을 뜨게 되었다. 바로 듣고 바로 보기 위해서는 성령의 감동하심이 필수적이다.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들을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을 바로 깨달을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보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 빛이다. 빛이 없으면 눈을 아무리 크게 떠도 보이지 않는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1:4). 인생의 길을 밝히 보기 위해서는, 세상의 형편을 바로 보기 위해서는, 빛 되시는 예수님을 영접해야 한다. 그 분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14:6)이시기 때문이다. 그로 말미암지 아니하고는 하나님께로 갈 자가 없다. 그로 말미암지 아니하고는 하나님의 뜻을 알 자가 없다.

 

  하나님의 신에 감동한 발람이 무엇을 보았는가? 그리고 무엇을 말했는가? 본문 말씀에 기록된 것을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비록 메마른 광야에 천막을 치고 있을지라도, 발람에게는 그 곳이 아름다운 곳으로 보였다. ‘강가의 동산 같고, 물가의 백향목 같이’(6) 보였다. 비록 거친 광야에 임시로 천막을 치고 살아도,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곳이 낙원임을 보았다. 고대광실(高臺廣室) 높은 집에,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이 살아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곳에는 염려와 근심뿐이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警醒)함이 허사’(127:1)인 것이다.

 

  어디에 살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 없이 사는 기름진 곳인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광야인가? 할 수만 있다면 하나님과 함께 하는 기름진 땅에 살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불가불(不可不)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진정 어느 곳을 택할 것인가? 하나님과 함께 거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먼 곳에 있다. 그러나 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매일 매일 매 순간 순간을 하나님의 나라에서 사는 것이다.

 

  마음이 없으면 지척(咫尺)도 천리(千里), 마음이 있으면 천리(千里)도 지척(咫尺)이.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곳이라면, 하나님을 내 안 모시고 사는 곳이라면, 그 곳이 초막이든 궁궐이든 상관이 없다. 그 곳이 이미 천국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에는 비록 광야 같고 초라해 보여도, 하나님을 마음속에 모시고 사는 사람은 이미 모든 것에 부요(富饒)한 사람이다. 이와 같은 삶을 가리켜서, 바울은 말했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우리가 살고,...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富饒)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9-10).

 

  발람은 또 말했다. 저를 축복하는 자마다 복을 받을 것이요, 저를 저주하는 자마다 저주를 받을 것이라”(9). 성도에게는 세상의 저주가 효력이 없다. 하나님의 아들을 저주하면 그 저주가 자신에게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발람이 아무리 이스라엘을 저주하려 해도 그렇게 되지를 않는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세상의 저주가 해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8:1)

 

  복 받는 길이 무엇인가? 다른 사람을 향해서 복을 비는 것이다. 그것이 복 받은 심령이다. 특별히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을 향해서 복을 비는 것이 복 받는 비결이다. 자신만 바라보는 사람은 다른 이의 복을 빌 마음의 여유가 없다. 어차피 나는 하나님의 자녀로 인() 침을 받았으므로 걱정할 것이 없다. 내 이웃을 위해서 복을 빌어야 한다. 그것이 둘 다 잘되는 길이다. 저를 축복하는 자가 복을 받을 것이라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다.

 

  저주의 말은 꿈에라도 하지 말 것이다. 성도의 입에서 나올 말은 축복의 말 뿐이다. 예수께서도 제자들을 마을에 내려 보내시면서 말씀하셨다.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을 빌라”(10:12).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셨다.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10:13). 하나님의 사람을 영접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다.

 

  ‘눈을 떴다는 말은 깨달아 알게 되었다는 말이다.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했을 때는 아무렇게나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는 알게 되었다. 바로 볼 줄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는 밝히 말해야 하는 것이다. 얼마나 바로 말하고 살았는가? 무슨 말을 많이 했는가? 할 수 있는대로 축복의 말을 하고 살아야 한다.

 

  밝게 보기위해서는 감았던 눈을 떠야 한다. 육신의 눈과 함께 마음의 눈을 떠야 한다. 육신의 눈이 멀쩡해도 마음을 닫고 있으면 아무리 똑바로 보려 해도 똑바로 보지를 못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때 무지에서 눈을 뜨게 되고, 절망 중에도 소망을 가지게 되고, 실패의 자리에서 일어서게 된다. 죄에서 깨끗하게 된다. 심령의 귀가 열리고,  죽었던 심령이 살아난다(11:5).

 

  밝히 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1:7)이니다. 세상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으면 그 지식을 올바로 사용하지 못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 모든 것에 앞서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먼저해야 할 일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다. 좌우에 날선 칼같이 예리하다. 그래서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한다.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모두 아신다(3:12). 하나님께서 귀를 열어 주셔서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하게 듣고 살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보아서 안 될 것을 보게 되고 말해서 안 될 것을 말하고 살게 된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신령한 눈을 뜨고, 신령한 귀가 열리게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로 보며, 하나님의 사랑으로 세상을 사랑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으로 세상을 향해 전하고 살아야 할 것이.

 

(옹달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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