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9장 1-8절
예수께서는 베드로, 요한, 야고보를 데리시고 높은 산에 올라 가셨다. 그 이유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누구인가를 분명하게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다. 예수님은 자신이 구약의 대표적인 두 인물인 모세와 엘리야가 증거한 그리스도시라는 것을 보여주시려 하신 것이다. 율법을 대표하고 선지자를 대표하는 그들의 대화 내용은 예수님의 예루살렘에서의 죽으심이었다.(눅 9:30)
하니님께서도 음성으로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신분을 확증해 주셨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막 9:7) 예수께서는 이미 당신이 그리스도이심을 공식적으로 밝히셨지만(막 8:27-38), 유대인들의 기대와는 달리 군사적 메시야가 아닌 죽임을 당할 어린양으로써 자신의 사역을 소개하고 예고하자 제자들은 이해할 수 없었고 반발까지 했기 때문이었다.
예수께서는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모하셨다.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영광의 모습을 보여주심으로 고난과 죽음의 예고가 자신감이 없거나 패배적인 체념적인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에 속하는 것임을 알게 하신 것이다. 그리고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가 장차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것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셨던 것이다.(눅 9:30)
아무리 좋은 집에서 많은 돈을 가지고 호화스럽게 살아도, 아무리 훌륭한 남편과 아내가 같이 살아도, 만족이 없고 불평불만이고 원망의 소리뿐인 세상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하나님을 원망했다. 하나님께서 왜 그러냐고 물으셨다. 이스라엘 백성은, '먹을 것이 없고, 물이 없고, 고기가 먹고싶어서'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서의 원망과 불평이 무엇이 부족하거나 없어서가 아니라, 그들 속에 하나님이 없어서 불평불만임을 아셨다.
그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만나를 주시고, 메추라기를 코에서 냄새가 나도록 먹게 하셨다. 그리고 물이 없을 때는 반석에서 생수가 나게 하셨고, 밤에는 불기둥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셔서 부족함이 없게 해 주셨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원망하고 불평했다.(민11장) 그들은 하나님 한 분만이 부족함이 없는 분임을 몰랐다.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23:1) 하고 노래했다. 인간에게 하나님이 없는 한 아무리 좋는 환경과 좋은 조건을 갖추고 살아도 만족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본문에서 베드로는 높은 산에서 “여기가 좋사오니” 라고 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좋게 해 주었을까? 왜 무엇이 그로 하여금 부족함이 없이 여기가 좋사오니 라고 말하게 했을까? 순간 예수님 한 분만으로 만족했던 것이다. 영광스러운 주님이 곁에 계시니 그렇게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예수께서 함께 하시는 곳에는 그대로가 좋고 그대로 오래있고 싶었을 것이다. 행복의 극치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신 참 행복이다.
모든 것이 짜증스럽고 불평스럽고 원망스럽지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을 깨달을 때 여기가 좋사오니 할 수 있는 것이다. 멋을 기대하고 사는가? 바울은,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이라”(빌1:20)고 했다.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이 그대로 좋고 거기가 좋다는 것이다. 세상의 좋은 것에 속지 말 것이다. 세상이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러운 것에 속지 말아야 한다. 아담은 그것에 속아서 멸망을 자초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그리고 이생의 자랑, 세상의 향락에 속아서는 안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그것만이 좋은 것이다. 초막이나 궁궐이나 그 어디나 예수 그리스도를 모신 곳이 천국이다. 베드로가 정신없이 한 말이지만 “여기가 좋사오니” 한 것은 정말 잘 한 말이다. 왜 베드로가 이렇게 정신없이 말했을까?
예수님의 변모는 본래의 모습이 보여진 것뿐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의 본체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고 사도 요한이 자신들과 함께 사셨던 예수님을 기억하며 고백했다. 태초부터 영화로우신 분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잠시 초라한 모습으로 인간의 모습으로 살아가신 것뿐이다.
바울은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빌 2:6-7)고 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신 후 부활하신 다음에, 영광스럽게 나타나실 모습을 미리 보여 주셨다. 베드로는 그 영광의 주님을 보는 순간, 세상의 어떤 좋은 것도 쓰레기 같고 더럽게 느껴졌을 것이다.
세상에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3절) 깨끗한 주님의 본래의 모습인 영광의 모습을 보는 순간, '여기가 좋사오니' 라고 정신없이 거기에 도취해 버렸다. 다른 아무 소원이 없게되어 버린 것이다. 아직도 예수님 곁이 싫고 세상 것이 좋은 것은 영광의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만나지 못한 까닭이다. 베드로가 만난 주님, 요한이 만난 주님. 바울이 만난 주님을, 우리도 성경 속에서 만날 수가 있다.
그런데 본문에서 베드로가 예수님과 모세, 엘리야를 구별하지 못했다. 예수님은 창조자이시고 모세나 엘리야는 피조물이다. 세례 요한에 대해서 예수님은 '여자가 난 자중에 가장 큰 자' 라고 평을 하셨다. 그러나 그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서, “나는 그분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할자” 라고 했고, “그는 흥해야겠고 나는 쇠해야겠다” 고 했다. 모세나 엘리야도, 세례 요한처럼 예수님 앞에 무릎 굻고 엎드려 경배 드려야 할 사람들일 뿐이다. 베드로는 아직 그 큰 차이를 모르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한분 밖에 영광을 받으실 분은 세상에 없다.
베드로는 자기 도취에 빠져서 진정 자기의 일이 무엇인지를 잊었다. 예수님이 영화롭게 되셨으니 이제 모든 일은 끝났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가정을 돌보고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하는 자기의 일을 잊고, 초막 셋을 짖고 산 속에서 살자고 한 것이다. 예수님의 영광을 자기들 눈으로 뵈었으니 더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이해가 가는 말이다. 그러나, 그 영광스러운 변모의 목적은, 제자들로 예수님의 신분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확신과, 하나님의 구원 섭리에 대한 참 지식을 주시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 산 속에만 계실 수는 없다. 그런데 베드로는 자기들만 예수를 모시고 산 속에서 살자는 것이다. 바로 얼마 전에 예수님으로 하여금 십자가를 지지 못하도록 간하다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책망을 받은 적이 있다. 그런데여기서도 또 같은 실수를 하고 있는 것이다. 자칫 환상에 빠져서 받을 축복에만 관심이 머물고 해야 할 일은 잊어버리는 수가 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함께 산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들고 세상으로 내려가야 함을 잠시 잊었던 것이다.
베드로의 실수는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다른 사람이야 지옥에 가든 말든, 자기들만 천국에서 살면 되고,
천국을 자기들 몇 사람이 독점하려고 했다. 바울은,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롬9:3)라고 했다. 모세도 백성을 멸망시키려거든 생명 책에서 자기 이름을 빼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런데 베드로는 어쩌자고 사랑하는 처자식이며 백성들을 외면한 채, '여기가 좋사오니 여기서 우리끼리 살자'고 했는지 모르겠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만을 위해서 사는 삶이 아니라 교회와 이웃을 위해서 사는 삶이 되어야 한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변화된 모습을 보고 자기를 잊어 버렸다. 변화된 그 영광스러운 순간에 자기 모습이 보였다면 멀리멀리 도망쳐 버릴 것이고, 이사야처럼,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인데 만군의 하나님을 뵈었음이로다'(사 6:5)라고 했을 것이다. 이사야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을 뵙고 '나는 망했다' 고 고백했다. 그 거룩한 영광의 빛에 자기 모습이 들어난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더럽고 추한 자기의 모습을 전혀 관계치 않고, 다만 주님만 바라보았다. 이것이 '복음'이고 이것이 '하나님의 의'다.
하나님의 율법 앞에서는 나의 더러운 모습이 낱낱이 보이기 때문에 견딜 수가 없다. 천국에 가서 자기 죄가 보이면 지옥보다 더 못하다고 어떤 사람은 말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내 더러운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가리워지고, 은혜로 가리워진다. 내 죄와 허물과 수치와 그 부끄러움이 사라져 버리고 주님의 영광만 보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고 은혜다.
아직도 죄책에서 해방되지 못했는가?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영광스러운 주님을 바라볼 때, 자기 모습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 베드로는 그저 영광스러운 주님만 보고 그저 좋아만 하고 있었다. 어린이와 같이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어린이는 자기가 어떤 처지인지, 남이 욕을 하는지, 싫어하는지 전혀 개의치 않는다. 자기가 좋으면 좋고, 자기가 나쁘면 싫은 것이다. 슬프다가도 기쁘면 금방 웃는다. 베드로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처자식 걱정도 하지 않고 집안 걱정도 하지 않았다.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염려하지 않았다.
내 처지가 불행하다고 느끼는 것은 항상 세상을 보고 내 처지를 보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못 생겼고 이렇게 못 배우고 이렇게 가난하다고 생각하며, 늘 옆 사람을 보고, 세상을 보기 때문에 항상 불평이고, 불만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 보고 나를 보아야 한다. 그럴 때만 여기가 좋사오니 할 수 있다. “나와 세상은 간곳 없고 구속한 주님만 보이는 것” 이것이 천국이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고,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갈 2:20)이기 때문이다. 내 추한 모습도 내 이기적인 생각도 내 장래 모든 염려도, 내 자녀들의 모든 문제도 다 장사지내 버렸다. 나와 세상은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게 된 것이다.
그런 베드로에게 하나님께서 음성으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셨고,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뿐이었'다(막 9: 7,8). 하나님이 베드로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으라'고 하신 것이다. 우리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만 듣고 순종하고 사는 삶이 되어야 한다. 내 이성의 말도, 세상의 철학적인말도 들을 필요가 없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영광스러운 주님의 음성만 듣고 그 분의 명령에 순종하면, 베드로가 체험했던 그런 영광스러운 삶을 영원히 누릴 수가 있다.
나를 나타내지 말고 나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야 한다. 그의 영광 존귀와 의의 빛에 나는 가리워지고, 그분만 들어나야 한다. 그 빛으로 내가 돋보이게 되면 그것은 나로 인해서 주님의 영광이 가리워지게 되는 것이다. 바울처럼, 우리도 고백해야 할 것이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가장 존쥐하게 되는 것”이라고. 나의 모든 것을 십자가에 못박고 장사지내야 한다. 그리고 나는 그리스도의 영광 속에 숨겨져 있어야 한다. 그것이 '저의 말을 듣는 것'이다.
(옹달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