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7장 14-25절
‘키일 케가드’라는 사람은 인간을 ‘끊임업이 흔들리는 존재’요 ‘불안 그 자체’라고 말했다. 인간은 끊임없는 갈등을 안고 살아가는 존재라는 말이다. 성경 말씀 가운데서 바울은 이 ‘갈등’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선을 행할 능력이라고는 하나도 없으면서 선을 행하고 살기를 원하는 인생, 그러나 실상 지나고 보면 원했던 선은 하나도 행하지 못하고, 환경을 핑계삼아 악을 일삼고 살아가게 되는 인생, 이 갈등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에, 바울의 고민이 있는 것이다.
베드로는 한때 죽으면 죽었지 주님을 부인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호언 장담했다. 그런데 바로 몇 시간 뒤에 그는 예수를 부인하고 말았다. 한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다. 내가 내일 무슨 말을 하게 될른지 아무도 모른다. 나 자신도 모른다. 죽으면 죽었지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던 사람은 누구며, 몇 시간도 못되어 주님을 부인해버린 사람은 누구인가. 똑 같은 사람 베드로였다. 먹은 마음을 행동으로 나타내기가 쉽지 않음을 말해주는 사건이었다.
인간은 이렇게 모순과 부조리 속에서 살고 있다. 그러면서 어떻게든 이 모순과 부조리를 합리화하려 애쓰고 있는 것이 인간의 모습이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고 변명하려는 것이다. 예수님이야 딸린 식구도 없지만, 베드로는 늙고 병든 어미와 처자식이 있다. 자칫하면 예수님처럼 잡혀 들어가야 되기 십상이니, 차라리 예수가 누구인지 모른다고 해야, 자신과 가족의 안전을 도모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사람이 살다 보면, 깊이 생각하고 하는 말이 있고 무의식중에 하는 말이 있다. 베드로가 죽어도 예수님을 부인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한 말은 깊이 생각하고 한 말이다. 그러나 베드로가 예수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한 말은 엉겹결에 나온 말이다. 무의식중에 튀어나온 말이다.
프로이드라는 심리학자는, 인간의 내면 세계를 초자아(Super-ego)와, 그리고 본능(Id)으로 나누고, 인간의 외면세계를 자아(Ego)라고 했다. 초자아는 양심의 소리이며, 본능은 타락한 심성이다. 따라서 자아가 초자아의 통제를 받으면 본능을 이기고 이성과 양심의 소리를 듣게 되지만, 자아가 본능의 통제를 받게 되면 양심의 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고,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인생은 많은 경우에 양심의 소리를 들으려하지 않고 본능의 소욕을 따라 살고 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하는 것이다. “내가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면서,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25절) 때로 우리는 얼마나 자주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고 사는지 모른다. 마음으로는 사랑하겠다고 다짐하면서도, 실제로는 미움과 증오를 가지고 살고 있는 것이 우리의 삶의 모습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내 지체 속에 다른 한 법이 있어서 내 마음과 싸워 이김으로, 나를 죄의 법 아래로 사로잡아 가기 때문“이라고 바울은 말한다.(23절) 겸손해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고는 오히려 교만해진다. 이해해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고는 매사 내 나름대로 판단함으로 남을 오해한다. 도와주고 세워 주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어놓고는 깎아 내리기에 바쁘다.
그래서 바울은 말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심한 고민이 그에게 있다는 말이다. ‘곤고하다’는 말은 ‘비참하다’는 의미가 있는 말이다. 겉치레는 그럴 듯 하게 포장해서 아름다운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 속을 들여다 볼 때 비참하기 그지없는 것이 자신의 모습임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마음으로는 항상 선한 일을 하고 살고 싶은데, 행동은 항상 원치 않는 악을 행하고 살고 있다는 것이 바울의 솔직한 고백이다.
본문 로마서 7장에 나오는 바울의 고민을 연구해 논문을 써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 여러명 있다고 한다. 바울의 고민이 저들에게 큰 유익이 된 셈이다. 바울은 말했다. “원하는 선은 하지 않고 원치 아니하는 죄만 짓는다”. “나는 죄에 사로잡혔다”. “나 외에 또 다른 내가 나를 지배하고 있으며, 그가 나를 죄로 끌고 간다”. 너무나도 솔직한 고백이다. 대체로 사회적인 지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자기의 추한 꼴을 감추려 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다.
바울은 사회적으로 명망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자기의 치부를 들어내며, “나는 이런 사람입니다” 하고 고백하는 것이 본문의 말씀이다. 여기에 바울의 위대함이 있다. 자기를 바로 볼 줄 알면 문제의 반은 태반은 이미 해결된 것이다. 바울은 자기의 실존을 바로 보았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그를 곤고한 사망의 몸에서 구할 자가 이 세상에 없음을 알았다.
바울은 이 문제의 해결점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찾았다. 양심의 법으로도 안되고 육신의 법으로도 안되지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말했다.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25절) 예수 그리스도의 법이 온전히 나를 지배함으로만 내가 선한 삶을 살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의 법,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의 법, 예수 그리스도의 섬김의 법, 그 법이 나를 지배하도록 맡겨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법으로 충만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선한 열매를 풍성히 맺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옹달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