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5장 12-21절
어떤 목사가 어느 추운 겨울 날, 하루 종일 전도하고 다니다가, 저녁때가 되어 집에 들어가니 아내가 아이들과 함께 자고있었다. 배는 고픈데 저녁준비는 안되어 있고, 아내는 아이들과 함께 잠들어 있었다. 자고있는 아내를 깨워서 저녁 좀 먹자고 했더니, 연탄도 없고 쌀도 없는데 무슨 밥이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저녁을 굶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했다. “하나님, 이게 뭡니까? 내가 날마다 나가서 전도하고 다니는데, 아 그래 저녁밥도 한 그릇 안 주십니까?” “나를 굶겨 가지고 꽁꽁 얼려서 데려가실 작정이십니까?” 하고 항의 비슷한 기도를 했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범사에 감사하라”(살후5:18). 그래서, 배는 고프고 춥지만,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하고 말했다. 그런데 뭐가 감사한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성경 말씀에 ‘범사에 감사하라’ 했으니 무슨 이유가 있겠지 하고, 계속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한참 그렇게 기도하는데 마음속에 깨달음이 왔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께 능치 못하신 것이 있겠는가?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심을 내는데(엘리야처럼) 무엇 때문에 나로 하여금 굶게 하시는가? 매사 ‘필유곡절’이라, 생각하며 더 기도하는 가운데 세미(細微)한 하나님의 말씀이 들렸다. “네가 춥고 배고픈 사람들의 마음을 아느냐?” “사람의 생명이 누구에게 달렸느냐?” “참새 한 마리도 내 뜻이 아니면 땅에 떨어지지 않거늘, 무엇을 가지고 네가 불평하느냐?” “한끼 굶은 것을 가지고 그 야단이냐?, 세상에는 너보다 힘든 사람이 엄청 많이 있다”
그 말씀을 듣고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하나님이 필요하시면 열흘이 아니라, 사십일을 굶어도 살게 하실 것이 아닌가? 왜 그 믿음을 가지지 못했는가? 그것을 깨닫고 나니 너무 기뻐서, 억지로 하던 감사가 진짜 감사로 변했다. 밥 굶고 기뻐 뛰기는 그 때가 처음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살아서 건강하게 목회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런 것이다. 무엇을 염려하는가? 기도할 수 있는데. 기도하면서 왜 염려하는가? 기도하면서 왜 실망하는가? 추수감사주일은 날을 정하여 특별히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함을 드리자는 날이다. ‘터키 먹는 날’로 그쳐서는 안된다. 진정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고백의 예배를 준비해야 한다.
본문 말씀 20절에,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하는 말씀이 있다.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죄를 덮어 주시고 의롭다 여겨 주신 것이 은혜다. 의로운 사람을 의롭다 하는 것은 은혜일 것도 없다. 스스로 죄인임을 아는 사람이 참으로 은혜를 아는 사람이다.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다. 그 은혜가 얼마나 내게 넘치는가를 말씀하고 있다.
우리가 왜 죄인인가? 하나님이 우리를 애당초 죄인으로 만들어 놓으셨는가? 아니다. 책임을 전가하는 것 같지만, 내가 죄인 된 것은 아담 때문이다. 피는 속이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스스로 죄인 된 아담의 피가 내 안에 있으므로 죄인이다. 한사람 아담이 범죄한 것은 아담 개인에게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다. 성경이 분명하게 말씀한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다”(12절)고.
그래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고,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게 되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된 것이다. 한사람의 영향이 이렇게 큰 것이다. 한 가정의 가장이 바로 서면 온 가정이 바로 서게 된다. 한 나라의 지도자가 바로 서면 온 나라가 바로 된다. 한 교회의 지도자들이 바로 서면 온 교회가 평안해 진다. 북한의 2천 500만 동포들, 그들이 왜 저렇게 고난 가운데 있는가. 한 사람 지도자가 공산주의를 택했기 때문이다. 한 사람 지도자가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다. 바로 되는 길은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길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죄를 한꺼번에 해결할 길을 열어 놓으셨고, 예수 그리스도는 그 길에 스스로 속죄의 제물이 되셨다. 그가 하나님께 순종하심으로, 그를 믿는 모든 사람이 죄 사함의 은총을 입게 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옴으로 속죄함을 입을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셨다. 그래서 “지극한 그 은혜 내게 넘쳐 날 불러 주시니 고마워라”(찬송가 378장 1절)하고 찬송할 수 있게 하셨다.
그가 창에 찔리신 것이 내 허물 때문이요, 그가 채찍에 맞으신 것이 내 죄 때문이다. 허물 많은 나, 죄인인 나때문에 예수께서 몸을 찢기시고 피를 흘리셨다. 이 은혜가 내게 넘침으로, 내가 찬송하는 것이고, 이 은혜가 넘치므로 내가 감사하는 것이다. 이 은혜가 내게 넘침으로, 내게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감사하고, 기뻐하고 찬양할 수밖에 없다.
모세에게 주신 율법만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있어야 한다. 율법은 죄를 들어나게 하는 것이요, 은혜는 죄를 덮는 것이다. 노아의 세 아들 가운데 누가 가장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는가? 아비의 치부(恥部)를 덮어준 ‘셈’이었다. 은혜가 있어야 이것이 가능하다.
John BunYan이 쓴 천로역정(天路歷程)에 나오는 이야기가 있다. 크리스챤이 장망성(將亡城)을 떠나서 시온산을 향해 길을 가다가 어떤 마을에 다다랐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어디를 가느냐고 물었다. 나는 크리스챤으로 천성(天城)을 향해 가는 사람인데 도움을 구한다고 했다. 그랬더니 마을에 살고 있는 어떤 집을 찾아가서 그 집 주인에게 부탁하면 좋은 길을 가르쳐 줄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이 사람은 그 집을 찾아가서 도움을 청했다. 그 집 주인은 이 사람을 데리고 큰 헛간으로 들어갔다. 그 방에는 먼지가 두껍게 쌓여 있었다. 도무지 청소를 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주인은 하인을 부르더니, 비를 가지고 와서 이 먼지를 다 쓸어내라고 했다. 하인이 큰 빗자루를 가지고 와서 방안을 쓸기 시작하니, 온 방안이 먼지투성이가 되어 숨을 쉴 수조차 없게 되었다.
주인은 다른 하인을 불러서 물을 가져다가 뿌리라고 했다. 그랬더니 먼지가 가라앉으면서 말끔히 정소를 할 수 있었다. 율법으로 되지 않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된다. 이 은혜가 넘쳐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내 삶에, 내 가정에 교회에 넘쳐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께 크게 영광을 돌릴 수 있다.
(옹달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