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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시와 수필

연 못

by ongdalsem 2020. 6. 28.

 

나는 농촌에서 태어나서 자랐기 때문에, 방학이 되면 시골집으로 내려가서 농사일을 거들곤 했다. 대개 천수답(天水畓)이 많아서 여름에 가뭄이 들어 비가 제때에 내리지 않으면, 벼논에 물을 끌어대느라고 마을의 보()치는 일도 도와야 했다. (평소에 물이 좀 고여 있는 개울을 깊게 파서 물을 끌어대는 것을 보를 친다고 말한다.)

  우리 논() 옆에는 다행히 연못이 두 개가 있어서, 가뭄이 들어도 논에 물 대는 걱정은 별로 하지 않고 벼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벼가 한창 푸르게 자랄 즈음이면 아침 일찍 일어나, 자전거를 타고 집에서 약 오리(2km)쯤 떨어진 곳에 있는 논으로 가서, 자전거를 연못가에 세워두고 논배미마다 물이 제대로 채워졌는지 물고를 검하곤 했는데, 그러던 중에 나는 이상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큰 신작로(新作路) 길을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연못이 하나씩 있는데, 오른쪽에 있는 연못의 물은 언제 보아도 늘 맑고 깨끗하였으나, 왼쪽에 있는 연못에는 늘 흙탕물이 고여 있는 것이었다. 두 연못 모두 지하수가 흘러나와서 고여 있는 연못인데 서로 그렇게 다른 모양을 하고 있었다. 왜 그럴까? 좀 이상하게 여기기는 했지만 내 성격이 본시 생각이 둔하고 추리(推理)가 약해서, ‘원래 더러운 연못은 아무리 맑은 지하수가 흘러 나와도, 그 연못이 맑고 깨끗하게 되지는 않는 것이다.’ 라고 결론을 내고, 그런 생각은 꽤나 오랫동안 나의 사회관(社會觀)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렇게 세월은 흘렀고 나는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

  이민생활 5년쯤 지난 어느 날 조용한 이른 새벽에, 시원한 공기나 마셔볼 요량으로 산책길을 나섰다가 갑자기 그 생각이 났다. 나는 그 동안 연못의 물이 하나는 맑고 하나는 흐린 것만 보았지, 그 연못의 주변(周邊)을 눈여겨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신작로 오른편에 있는 연못은 그 벽을 돌로 쌓아서 축대(築臺)를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밖으로부터 쉽게 오물(汚物)이 들어올 수 없었다. 그래서 그 연못의 물은 늘 맑고 깨끗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신작로 왼쪽에 있는 연못에는 축대가 없었다. 한쪽 비탈로부터는 흙이 쏟아져 내리고 다른 한쪽은 신작로 길에 면()하고 있어서, 온갖 잡쓰레기와 흙먼지가 연못 안으로 날아 들어오는 그런 모양이었다. 그 연못 한쪽에서는 쉬지 않고 맑은 물이 솟아나는데도, 늘 흙탕물이 고여 있는 그런 연못이 되고만 것이다.

  그날 나는 나 자신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어떤 모습일까? 나는 방벽을 제대로 쌓지 않아서 세상의 온갖 오물로 채워진 채, 누런 흙탕물이 고여 있는 그 연못과 같은 사람이 아닌가? 속에서는 맑은 물이 흘러남에도 더러운 물을 밖으로 내어보내는 그런 사람 말이다. 그래서 속으로 다짐을 했다. ‘이제부터라도 한쪽 모서리부터 시작해 차근차근 축대를 쌓아서, 맑고 깨끗한 물을 받아 세상으로 흘려보내야 되겠다!’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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