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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동 생각

나중이 좋아야 한다

by ongdalsem 2020. 9. 20.

어느 날 예수께서 친척집 혼인잔치에 초청을 받아, 어머니를 모시고 제자들과 함께 ‘가나’ 마을로 올라가셨다. 잔치가 무르익어 가는데 포도주가 떨어졌다. 준비를 잘 한다고 했는데 그런 일이 벌어졌다. 일을 하다 보면 더러 그런 일이 생긴다. 잔칫집에 음식이 부족하면 손님들에게 큰 실례가 된다. 손님을 접대할 때는 모자라는 것보다는 남는 것이 나은 법이다. 당장 어떻게 해결 할 방법이 없으니, 잔칫집 연회를 책임지고 있는 연회장(宴會長)은 입장이 난처하게 되었다.

 

그 소식이 예수님의 어머니에게 들려왔다.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께 조용한 소리로 말했다. “이 집에 포도주가 떨어졌다는데 어쩌면 좋지?” 예수께서는 그 말에, “그게 나와 무슨 상관입니까?” 했다. 마리아는 하인들에게 말했다. “예수가 무슨 말을 하든지 시키는 대로 해라!” 마침 문간에 돌 항아리 여섯 개가 놓여 있는 것이 예수님의 눈에 보였다. 예수께서 하인들에게 말씀하셨다. “저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라!”

 

하인들은 아무 말 않고 시키는 대로 했다.돌 항아리에 물이 가득 채워지자,예수님은 그 물을 떠서 연회장에게 가져다주라고 하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인들이 돌 항아리에서 물을 떠가지고 연회장에게 가져다주었는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연회장이 보니 그것은 빛깔도 고운 포도주였다. 맛을 보니 이전 것보다 훨씬 좋았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는 두 가지 본질적인 것이 있다. 첫째는 생명의 말씀이요, 둘째는 교훈의 말씀이다. 첫째는 죽어야만 하는 죄인이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 말씀이고, 둘째는 구원 받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말씀이다.이 중 어느 한쪽을 무시하면 그건 말씀을 왜곡하는 것이다.

 

성경은,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는 말씀'(딤후 3:!5)인 동시에,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는 말씀'(딤후 3:16)이다. 그런데 때로 교훈을 이야기하면, ‘은혜로 구원 받는 것이지 교훈이나 율법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고’ 따지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성경은 은혜로 구원 받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한다. 하지만 성경은 은혜로 구원 받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도 말씀하고 있다. 이 시대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문제는 말씀을 왜곡해서 생긴 것들이다. 생명의 말씀, 축복의 말씀만을 강조하고, 교훈의 말씀을 통해 성도의 삶을 온전케 하는 일을 소홀히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이 교회를 향해 ‘너나 잘 하라’고 손가락질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날 그 잔칫집에서는 두 가지 주목할 만한 일이 일어났다. 첫째로, 맹물이 포도주로 변했다. 예수가 누구이신 가를 증거 한 사건이다. 그는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의 본체시다. 아무리 성경을 달달 외고 있어도 예수가 누구신가를 확실히 알지 못하면, 성경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그는 모든 것을 바꾸실 수 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삶은, 맹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것처럼 그 본질이 변하게 되는 것이다. 말씀은 능력이다. 사람을 변화시킨다. 고난을 평안으로, 슬픔을 기쁨으로 바꾼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면 사망의 길을 가던 사람이 영생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절망이 소망으로 바뀐다. 탄식이 찬송으로 바뀐다. 무엇 때문인가?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다.(고전 5:17)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이시다.

 

둘째로, 처음보다 나중이 더 좋게 되었다. 이것은 말씀으로 변화 된 인격이 성장해가는 모습을 비유해 볼 수 있는 말씀이다. 나중에 나타난 포도주를 맛본 연회장이 말했다. “아니 이런 좋은 포도주가 어디에 숨어 있었지?” 그리고는 신랑에게 말했다. “이보게, 자네는 참 대단한 사람일세. 보통은 잔칫집에서 처음에는 질 좋은 술을 내다가도, 손님이 어느 정도 취하면 물을 타거나 좀 덜 좋은 술을 내는 법인데, 자네 집에서는 나중에 더 좋은 술을 내 오는구먼!” 그 날은 잔치가 더욱 흥겨운 날이 되었다. 정말로 즐거운 잔칫날이 되었다.

 

무엇 때문인가?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하셨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이든 사회생활이든, 인간관계든, 모든 삶이 그런 것이다. 처음에는 잘하다가도, 시간이 흐르면 소홀하게 되는 것이 보통인데, 살아가면서 더 좋은 마음, 더 좋은 관계로 이어질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칭찬으로 시작해서 욕으로 마치는 것 보다는, 욕으로 시작했지만 칭찬으로 마치는 것이 좋은 관계가 되는 것이다. ‘저 사람 내가 잘못 봤네!’ 이렇게 되는 것 보다는, ‘저 사람, 지내보니 가까이 할수록 좋은 사람이야!’ 하는 관계가 좋은 관계다.

 

형편이 좋을 때는 별별 사람들이 다 친구를 자청하며 몰려들지만, 곤고한 환경에 처하면 떠나기를 먼저 하는 것이 세상인심이다. 아쉬울 때는 간이고 쓸개고 다 빼어줄 것처럼 하다가도, 자기의 목표가 이루어지면 쉽게 얼굴을 바꾸는 것이 세상의 모습이다. 그리스도인이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 세상의 지탄을 받는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것을 기뻐하시지 않으신다. 허구한 날 밖에 나가 욕이나 먹고 들어오는 아들을 보고 기뻐할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변화된 인격으로, 이웃과 함께 이전보다 더 좋은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한다.

 

흔히 말하기를, 초년의 운세가 좋은 사람이 있고, 중년의 운세가 좋은 사람이 있고, 말년의 운세가 좋은 사람이 있다고 한다. 어떤 삶이 복 있는 삶일까? 말년의 운세가 좋은 사람이 가장 복 있는 사람이다. 나중이 좋아야 한다. 끝이 좋아야 한다. 개인도, 가정도, 교회도, 정치도, 경제도 마찬가지다. 믿고 구원을 받았다는 것도 처음보다는 나중이 잘된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참 으로 복을 받은 사람들이다.

 

사담 후세인의 말로, 오사마 빈 라덴의 죽음, 모두 불행한 삶이다. 온 세계의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잘 죽었다고 만세를 불렀다. 잘 죽어 없어졌다고 세상 사람들이 만세를 부르는 삶을 살아서야 되겠는가? 일부 재벌이, 일부 정치인들이, 일부 권력자들이, 일부 종교 지도자들이, 처음에는 잘 하다가 끝을 잘못 맺고 패가망신하는 것을 종종 본다. 나중이 잘못 된 것이다. 복 있는 사람은 나중이 좋은 사람이다. 시편 1편에,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이라고 했다.

 

나중이 잘 되는 사람은, 시작은 미약했어도 나중에 창대하게 되는 사람이다. 울음으로 시작했지만 웃음으로 마치는 사람이다. 교만하게 시작했지만 겸손하게 마치는 사람이다. 불의한 자리에서 의로운 자리로 나아가는 사람이다. 육으로 시작했지만 영으로 마치는 사람이다. 더 사랑하는 것이 나중이 잘 되는 길이다. 더 섬기는 것이 나중이 잘 되는 길이다. 나중에 웃는 삶이 성공한 삶이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바로 서있으면 그렇게 된다.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처음보다 나중이 더 좋은 만남이 되어야 한다. 모든 가정들이 지금보다 나중이 더 잘되는 가정들이 되어야 한다. 지금보다 나중이 더 좋은 교회로 성장해 가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바로 서 있으면 그렇게 될 것이다!

 

(옹달샘)

 

*2014년 3월 30일, 은퇴 전 마지막 설교 전문.

(참고:성경 요한복음 2장 2-11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