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목동 생각

마지막 부탁

by ongdalsem 2021. 4. 1.

"십자가상의 일곱 말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기 전에 먼저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을 용서해주시기를 하나님께 구하셨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 함이니이다.”(23:34)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용서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그렇게 생각처럼 쉽게 되는 것이 아니다. 나에게 고통을 주고, 나를 반대하는 사람에게 대해서는 미운 마음이 싹트기 쉽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고통 가운데 내어 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고통 가운데서 아버지여!’ 하고 부르짖으셨다. 하나님은 그 아들을 고통 가운데 내어 주셨지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3:17)’이라고 하시는 것처럼, 나는 비록 지금 불만에 가득 찬 가운데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나를 사랑하고 계시는 것이다. 이것 때문에 오늘도 나는, 아버지여! 하고 부르짖으며 하나님 앞에 나아올 수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하나님과의 긴밀한 교제가 있어 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용서는 끝까지 하는 것이다. 이제는 더 참을 수 없다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께 서 이 용서의 간구를 하셨기에, 오늘도 나는 그 놀라운 은혜를 감사하며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그 은혜가 죄와 더불어 사는 나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는 삶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기 전에 두 번째로,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23:43)고 하셨다. 예수님은 자기들의 죄로 사형을 당하는 두 강도 사이에서 나란히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한 사람은 네가 정말 그리스도라면 너와 우리를 구원해 보라고 예수님을 야유했고, 다른 사람은 그 사람을 꾸짖고 예수님께 자비를 구했다.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이 있으리라!”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예수를 믿은 강도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함을 받았다. 그는 그가 구원 받을 만 한 아무것도 한 것이 없었다. 죄 짓고 십자가에 매어 달려서 사형 당하는 죄인이 무슨 선한 일을 할 수 있었겠는가? 자기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믿고, 그에게 자비를 구한 것뿐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예수께서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그가 구원 받을 길이 전혀 없었다. 나는 이것도 하고, 저것도 했으니 하나님이 아실 것이다 하는 것은 교만이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 그래서 감사할 수밖에 없다. 자랑할 아무것도 하나님 앞에는 없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불쌍히 여겨 구원해 주십시오!’ 하고 기도할 뿐이다. 그럴 때에 오늘도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기 전에 세 번째로,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19:26-27)”하고 말씀하셨다. 누가 왜 십자가에 가까이 있었는가? 4명의 로마 군병들은 의무 때문에 있었고, 요한과 4명의 여자들은 애정 때문에 있었다. 막달라 마리아는 악귀에 묶여 있었다가 풀려난 사람이다.(8:2) 예수님은 나에게 빛을 주시기 위해서 어둠속으로 가셨으며, 내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신 것이다. 나로 하여금 천국의 부요함을 맛보게 하시기 위해서, 가난한 자 중 가난힌 자가 되셨다. 막달라 마리아가 십자가 곁에, 무덤 옆에 있었던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구원의 은총을 입은 자는 예수님 옆에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가 예수님을 버리고 어디로 가겠는가?

 

  예수 그리스도와 가까이 있는 것은 새로운 관계의 시작이다. 사랑하는 아들 예수를 잃어버린 어머니에게는, 아들 같은 요한이 있음으로 위로가 되는 것이다. 요한은 예수님 대신 예수님의 어머니를 돌보아 드려야 하는 것이다. 요한은 예수님의 역할을 대신 맡았기 때문에, 마리아를 사랑하고 돌보아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과 가까이 한다고 하는 것은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 예수님 안에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새로운 관계로 살아가는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기 전에 네 번째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27:46)하고 부르짖으셨다. 예수께서 당하신 십자가 고난은 어두움과, 처절한 고독이었다. 예수님은 어두움 속에 세 시간동안 손발이 못 박힌 채로 세워져 있었다. 3년 동안이나 가까이 따르던 제자들도 모두 떠나갔다. 우정도 간 곳 없고 교제도 다 헛것이 되고 말았다. 하나님으로부터도 버림받은 것 같고, 제자들도 모두 떠나가는 철저한 고독만 남았다. 그 말씀은 그렇게 버려진 것 같은 어두움과 고립된 상태에서 나온 절규였다. 암흑과, 고독, 그리고 모든 세상의 오해보다도 더 고통스러운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것만 같은 고통이었다.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것이다.

 

  그렇게 부르짖으신 예수님을 하나님은 버리지 아니하시고 무덤에서 살리셨다. 우리 인생도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동안 여러 가지 고난을 당한다. 때로는 하나님이 나를 버리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러나 내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 있는 한, 하나님은 결단코 나를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기 전에 다섯 번째로, “내가 목마르다!”(19:28) 하셨다. 예수님도 어린아이로 태어나셨고 젊은이로 성장하셨으며, 배고프면 잡수셨고, 목마르면 마시셨으며, 피곤하면 주무셨다. 때로는 울기도 하셨고, 사람들에게 매 맞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예수님도 나와 같은 의식과 경험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나는 예수님 앞에 나아와 기도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나의 고통을 아시기에 나의 위로자가 되실 수 있는 것이다. 목마름은 모든 인생에게 있어서 피할 수 없는 현상이다. 이것의 완전한 해결은 예수님과의 만남으로만 가능하다. 성경은 말씀한다.“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지니(7:16),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6:35). 인생의 갈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있을 때만 해결할 수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기 전에 여섯 번째로, “다 이루었다!”(19:30)라고 말씀하셨다. 십자가는 수치와 고통과 죽음의 상징이다. 그리고 속죄의 완성이다. 십자가상에서 예수님은 그에게 주어진 사명을 다 이루셨다. 무엇을 이루고자 하면 때로는 수치와, 고통과, 죽음이 따를 수 있다. 어떤 면에서는 이런 과정을 거쳐서 무엇이 완성되는 것이다. 힘 안들이고 쉽게 완성되는 일이란 흔치 않다. 출생의 기쁨은 해산의 고통 뒤에 오는 것이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인간은 누구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다 이루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일에 최선을 다해 충성할 것뿐이다. 다 이루었다는 말은 오직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 희생 제물로 드림으로 구원사역을 완전히 이루셨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아시고, 끝까지 순종하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셨다. 다 이루어 놓으신 예수님을 믿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여 따름으로, 이 세상에서 생명 다하는 날까지, 내게 주어진 사명 성실하게 감당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야 할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23:46)” 하셨다. 모든 사람은 살기위해 투쟁한다. 그러나 실상은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다. 그 시간은 하나님만이 아신다. 믿고 구원을 얻은 사람은 그것을 알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에게 마지막 순간이 주어진다고 하면 나는 무엇이라고 말할 것인가? 예수님은 실제로 죽으셨다. 세상에 있는 인간은 누구도 이것을 피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항상 이것을 대비하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성경은 말씀한다.(9:27)

 

  예수님은 담대하게 죽으셨다. 그것은 그가 항상 하나님 아버지와 교제하고 있었으며, 아버지의 약속을 신뢰했고, 모든 것을 아버지께 완전히 맡기셨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나에게는 다가오는 죽음을 담대히 맞이할 수 있는 어떠한 보장이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자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죽을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생명을 던지시기 전에 원수를 용서하셨고, 회개하는 강도를 구원하셨으며, 새로운 인간관계를 형성하도록 제자들에게 부탁하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일을 다 이루시고,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하시고 죽으셨다.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이 세상에 더 두실 것인가는 누구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므로 오늘 용서하고, 오늘에 충실해야 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미워하면서 죽을 수는 없는 것이다. 구원의 은혜 가운데로 행하며, 서로 돌보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충성되게 감당하며, 내 영혼을 기꺼이 아버지 손에 부탁하고 죽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승리의 삶인 것이다. 이와 같은 십자가의 삶이 있을 때, 그에게 부활의 영광이 주어질 것이다.

 

(옹달샘)

 

'목동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 말은 틀린 말이다  (0) 2021.02.02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0) 2021.02.01
나중이 좋아야 한다  (0) 2020.09.20
요한 처럼 살지 않으려면  (0) 2020.08.30
모든 살아있는 것에는 고통이 따른다.  (0) 2020.08.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