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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방 2/고린도 전후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by ongdalsem 2021. 1. 25.

  "고린도전서 11-9절"


  고린도교회는 A.D. 50년경에 바울이 세우고 18개월 동안 사역했던 교회였다.(행18:1-11) 그러다가 바울이 에베소로 떠난 후에 교회 안에 문제가 생겼다. 그 결과 고린도교회는 하나님의 교회 자체의 명예를 훼손하는 일을 하게 된 것이다. 여러 가지 사회악이 교회 안에 침투해 들어왔으나 이를 막지 못하고 있었다.

  고린도는 배 만드는 일과 상업이 발달한 무역중심의 항구 도시다. 사람들은 대부분 부유하게 살았고, 그에 따라 물질주의가 팽배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보다. 세상 쪽에 더 관심을 두고 살게 되었고, 일반 사회는 물론 교회 안에도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어서, 파당과 분쟁이 그치지 않았고, 온갖 범죄와 음행으로 교회의 거룩성이 훼손되고 있었던 것이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 중에 ‘글로에'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인편을 통해서 바울에게 이런 고린도교회의 문제들을 알려주었다.(11절) 그 소식을 들은 바울은 편지를 써서 교린도 교회에 보냄으로 교회로 하여금 교회 본연의 자세로 돌아갈 것을 권면한 것이 바로 본 서신이다.

  오늘의 교회 모습도, 이 고린도교회와 매우 비슷한 모양을 보여주고 있다. 사회는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매우 부패되어 있으며, 물질 만능주의에 젖어 있고, 하나님의 교회도 거룩성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으며, 분쟁의 소식이 꼬리를 물고 있다. 따라서 이 시대의 교회도 고린도 교회에 보낸 바울의 권면의 말을 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

  바울은 편지를 쓰면서, 우선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었다고 말하고 있다.(1절) 바울은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다. 여러 가지 좋은 조건을 갖춘 집안에 태어난다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은 아니다. 누가 자기의 출생을 선택할 수 있는가? 아무튼 바울은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다. 유대인이요, 베냐민 지파요, 로마제국의 출생시민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남들이 받지 못하는 훌륭한 교육을 받고 자랐다. 그의 선생인 '가마리엘'은 당대의 석학이었고, 그에게 배울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었다.

 

 가문이나 학벌이나, 무엇 하나 빠질 것이 없는 좋은 조건을 갖춘 바울의 소망은 무엇이었을까? 이미 그는 사회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고, 종교적으로도 꽤 중요한 지위에 있었다. 어쩌면 이미 그의 마음속에는 앞으로 그가 나아갈 ‘로드맵'이 그려 저 있었을 것이고, 그 한 과정으로 예수쟁이들을 잡아들이는 일에 앞장서서 공을 세우려 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승승장구 자기 계획대로 자기의 뜻을 살리기 위해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다. 그런 바울에게 전혀 예기치 못했던 사건이 벌어졌다.

  사울이라고도 불리는 바울이 예수쟁이들을 잡아들이려고 다메색으로 가는 도중에, 하늘로부터 갑자기 빛이 바울을 향해 쏟아지면서 누군가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바울은 눈을 뜨지도 못하고 질문했다. “도대체 그렇게 말씀하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행 9:5) 그 소리가 바울의 귀에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렸다. 바울은 자기 나름대로 계획도 세우고, 하나님을 위해 누구보다도 열심을 낸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하나님을 핍박하는 것이라니 얼마나 황당했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분명한 것이었다. 바울은 하늘로부너 들려온 예수님의 말씀에 자신이 깨어졌다. 그러고 나니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를 바로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쌓아 놓았던 모래성을 허물었다. 그리고는 자기의 계획을 버리고 진정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 

 

  바울은 그 이후로 무슨 일에나 자신을 앞세운 일이 없다. 그래서 그는 항상 고백하기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다'고 했다. 자신은 ‘죽든지 살든지, 오직 자기로 인해 그리스도의 영광이 들어나기를 원했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사는 것이 좋으나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나를 깨뜨려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게 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내 나름대로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하는 일이 오히려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 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일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간다고 하는 것은 내 뜻을 버리는 것을 말한다. 내 고집을 버리지 않고는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 없다. 하나님은 나 한사람을 통해서 영광 받으시기를 기뻐하신다. 예수께서도 자기의 뜻을 펴보려 하셨지만,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 아닌 줄 알고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고 기도함으로 자기의 뜻을 포기하셨다. 자기의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진실한 모습이 되어야 한다. 이런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고, 그리스도인의 삶은 참 만족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의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로 작정한 바을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빌었다.(3절) 지금까지는 교회를 핍박하고, 성도들을 괴롭히던 삶이었다. 교회야 핍박을 받든 말든 그런 것은 안중에 없었고, 자신의 뜻을 이루기에만 온 힘을 쏟아 부었다. 그런 바울이 180도로 방향을 바꾼 것이다. 자신이야 어떻게 되던 거기에 관심이 없고, 오직 교회의 평안과 하나님의 영광에만 관심을 집중시켰다.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구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다. 그리스도인의 본분중의 하나는 화목하게 하는 일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서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 이라고 말씀하셨다. (마 5:9)

  화평을 깨뜨리는 것은 하나님을 슬프시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지름길이다. 화평케 하는 것은 성도간의 교제를 아름답게 하는 기본적인 요소다. 화평함이 없고는 성도들 간에 진정한 교제를 이룰 수 없는 것이고, 진정한 성도의 교제를 잃게 되면 참다운 교회의 모습을 잃게 되는 것이다. 십자가는 수직적으로 하나님과의 교제와 수평적으로 성도간의 교제를 상징하고 있다. 수평적인 성도간의 교제가 없으면 십자가가 아니라 보기 흉한 몽둥이가 되고 만다. 수평적인 성도의 교제만 있고, 수직적인 하나님과의 교제가 없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 어느 쪽에서도 이미 십자가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게 되고 마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교제는 말씀을 가까이하고 기도에 힘씀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성도간의 바른 교제는 상대방을 인정해 주며 나를 먼저 낮출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잠언을 기록한 솔로몬도 이것을 깨닫고 말했다. “여간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잠 15:16)

  하나님은 고린도교회의 평안을 비는 바울의 서신을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바울이 내 뜻을 따른 것같이, 너희도 내 뜻을 따르라!” 내 모든 삶이 나의 뜻을 앞세우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삶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고, 이웃과 화목하기에 앞장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복된 삶이되기를 바란다.

 

(옹달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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